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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거기서 꼭 기다려

2022.08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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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날, 가족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고 자칫하면 아이를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잡했습니다. 아이가 온종일 친구들과 공차기를 할 만큼 활발한 데다, 나들이 전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들떴던 터라 더 걱정이었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날쌘돌이처럼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잘도 빠져 다니며 저희를 향해 빨리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엄마 손 잡고 가야 한다고 몇 번 주의를 줬지만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아빠 먼저 앉으라며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에 기특한 것도 잠시,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여기저기 구경하고 싶어 하는 아들의 본마음을 알아차리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자리에 앉고서도 환승역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였는지 모릅니다.

    한참을 가서 환승역에 도착하자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아들이 튀어 나갔습니다. 남편은 아들을 진정시키려고 따끔하게 눈총을 주고 손을 꼭 잡았습니다. 사람들에 치여 어린 아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남편은 조심조심 아들을 데리고 복잡한 입구를 빠져나갔습니다.

    계단에서는 나란히 걷기가 어려워 남편은 아들을 앞에 보내고 따라 내려갔습니다. 일은 거기서 일어났습니다. 환승해야 할 지하철이 곧 출발할 태세여서 급한 마음에 제가 “저거 타야 해”라고 외쳤는데 그 소리를 들은 아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지하철에 올라탄 것입니다. 아들을 뒤따라가던 저와 남편은 인파 속에 속도를 낼 수 없었고 지하철 문은 금세 닫혀버렸습니다. 당연히 아빠 엄마가 함께 탔을 거라 생각한 아들은 뒤를 돌아보고서야 혼자임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남편과 저 그리고 아들의 시간이 주변 사람들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짧디짧은 순간 아들의 불안한 눈빛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 역시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습니다. 남편은 우리가 불안해하면 아이는 더 불안할 거라며, 닫힌 문 너머로 아들을 쳐다보고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괜찮아.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다음 정거장에서 꼭 내려.”

    이 말을 몇 차례 반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들은 눈물을 곧 쏟아낼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하철은 냉정히 떠났습니다.

    다음 지하철이 오기까지는 3~4분 정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혹여 나쁜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가 버리면 어떡하나, 아이가 우리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다음 정거장에 내리지 않고 계속 가면 안 되는데…. 3~4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지나치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날은 제 인생에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열차가 빨리 들어오기를, 부디 아이를 지켜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기다리던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제 발은 이미 제자리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면 지하철 안에서도 뛸 태세였습니다. 같은 칸에 타야 아들이 내린 자리에서 내릴 수 있으니 어디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다음 역에 들어서면서부터 제 눈과 온 신경은 아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잠시도 다른 무언가를 응시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아들이 내린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지하철이 멈출 때까지 제 눈은 오직 아들만 찾아 헤맸습니다.

    문이 열렸지만 아들이 없었습니다. ‘큰일 났다.’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때, 저만치 의자에 앉아 있던 아들이 저희를 보고 달려왔습니다. 제 품에 꼭 안긴 아들은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침착하고 담담해 보였던 남편도 아이를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아빠 말 잘 들었네. 혼자 안 무서웠어?”

    “응. 아빠가 다음 역에서 내리라고 했잖아. 옆에 섰던 아줌마가 전화기로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했는데 내가 다음 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말했어. 아빠가 데리러 온다 했으니까. 엄마, 나 잘했지?”

    “그래그래, 고맙다.”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녀석이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기다려줘서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아빠 말을 금세 잊고 자기 마음대로 다른 곳에 내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아이를 보며 생각해 봅니다. 천사 세계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아 이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자녀들을 보며 아버지 어머니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까, 얼마나 걱정되셨을까 하고요. ‘내가 데리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네가 있는 그곳으로 내가 반드시 갈 테니 어디 가지 말고 내가 찾을 때까지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 애타는 음성을 잊고 살아가던 아들딸을 찾아 천국 본향으로 데려가시려 이 땅까지 오신 아버지 어머니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어머니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다짐합니다. 부질없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아버지 어머니께 또다시 걱정을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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