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몇 해 전부터 엄마가 주도적으로 이끈 프로젝트가 있었다. 일명 ‘내 가족 살리기 프로젝트’였다. 심장흉부외과 전문의인 엄마는 초기 응급처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환자들을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호흡만 유지된다면 한 명의 환자라도 더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한 엄마는 심폐소생술을 알리는 전도사로 나섰다.
엄마의 목표는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소중한 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다. 그 대상을 학생으로 삼은 엄마는 교육청에 협조를 요청해 학교에서 심폐소생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섰다. 엄마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초, 중, 고등학교에서 가장 먼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소방안전교육이 실시됐다. 이 학생도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최근 동해 근처로 전학을 오게 됐는데, 바닷가를 지나가다가 심폐소생술로 나를 구한 것이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한 글이 떠올랐다. 엄마와 내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신기해요.”
“나도 그 프로젝트의 혜택을 우리 가족이 받게 될 줄은 몰랐어. 학생!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저 형이 깨어난 걸 보고 제가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제 자신이 뿌듯하기도 하고요. 전에는 막연하게 의사가 꿈이라고 했는데 이번 기회로 확실해졌어요. 반드시 의사가 될 거예요. 그런데 의사는 병을 잘 고치는 게 최고잖아요. 어떻게 하면 그런 의사가 될 수 있어요?”
학생은 엄마가 의사라는 것을 알고 신이 나서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거야.”
“진심으로 환자를 대해야 된다는 말씀인가요?”
“글쎄, 아줌마 말이 다 맞지는 않겠지만 의술을 익히는 데 머리가 얼마나 좋으냐 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펼치느냐가 중요하다고 봐.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리려는 의지가 우선이지. 아줌마는 환자들을 모두… 내 아들처럼 생각한단다.”
엄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는 것 같아 얼른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억지로 감은 눈 안이 어지러웠다. 가장 소중한 사람처럼 환자를 대하는데, 그게 나라고?
엄마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의 관심에서 내가 벗어난 적은 없었다.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사춘기를 핑계 삼아 부지런히 방출하는 동안에도 엄마는 항상 내가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는지부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엄마한테 병원 일에 적당히 신경 쓰라고 불만을 터트렸을 때 엄마가 그랬었다.
“엄마가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그 덕이 너한테 돌아갈 수도 있어.”
엄마 말이 맞았다. 내가 살아난 것은 엄마의 덕이었다.
#4
“환자에게는 일분일초가 생사를 좌우합니다. 심장이 정지된 후 보통 4분에서 6분 사이에 뇌 손상이 일어납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소생하기가 어렵고, 운이 좋아 살게 되더라도 식물인간 상태가 되기 쉬워요. 가족이나 동료, 행인 등 심정지 환자를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119에 신고 후 구급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행할 경우 생존율을 3배 이상 높일 수 있습니다. 4분 안에만 심폐소생술을 해준다면 한 사람의 인생을 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심폐소생술을 4분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죠.”
강사가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심폐소생술은 복잡한 도구가 필요 없고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죠. 이 간단한 방법 하나로 한 생명을 살릴 수가 있어요.”
소방서에서 개설한 ‘심폐소생술 교육센터’ 교육은 세 명씩 팀을 나누어 이뤄지고 있었다. 나는 연세가 지긋한 아주머니와 어떤 학생과 같은 팀이었다.
젊은 강사가 몇 년 전, 한 초등학생이 평소 심장질환을 앓던 아버지가 언제 쓰러질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으로 심폐소생술을 익혀두었다가,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를 살린 일을 사례로 들면서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러고는 실습 인형의 가슴에 깍지 낀 손을 얹고 흉부 압박 시범을 보여주었다. 아주머니는 열심히 따라했다.
“언제 해보셨나 봐요. 아주 잘하시는데요?”
강사가 칭찬하자, 칭찬받은 사람답지 않게 아주머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걸 해봤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아주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강사가 당황하자 아주머니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아들이 아침에 운동 나갔다가 갑자기 쓰러졌어. 그러고는 영영 눈을 뜨지 못했지. 그때 병원에서 그러데. 주위에 심폐소생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어쩌면 아들은 살았을 수도 있었다고.”
아주머니는 아들을 잃고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사셨다고 한다. 그러다 뉴스에서 아들처럼 죽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소식을 듣고 심폐소생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자기 주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내 아들이라 생각하고 도와줄 거라고 말이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들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그런 엄마 마음을 몰라주는 자식들 역시 다 똑같다. 죽을 때까지 엄마의 마음 깊이를 재지 못할 테니까.
내가 만약 해수욕장에서 죽었다면 엄마는 어땠을까. 가슴에 나를 묻고 평생 아파하면서 사셨겠지. 그리고 엄마 속만 썩여드리다가 덜컥 죽어버린 나는 절대 천국은 가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서 정말 다행이다. 날 살려준 학생이 고맙다. 엄마에게… 감사하다.
#5
‘제발, 심장아 뛰어라!’
마음속으로 몇 번을 외치고 또 외쳤다. 이마와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는 사이 미약하지만 맥박이 잡혔다.
‘살았다!’
곧이어 119 구급차가 도착했다. 대원들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서둘러 구급차로 옮겼다.
“응급처치를 하셨다고요?”
팀의 대장인 듯한 대원이 물었다.
“아, 네.”
“학생이세요?”
“재수생이에요. 의대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요즘은 의대 입학 시험에 실기도 보나요? 응급처치를 어디서 배웠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는데 응급처지를 아주 잘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감사할 일이죠. 환자분도 깨어나면 정말 고마워할 겁니다.”
가슴에 감동이 차올라왔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누군가의 소중한 생명을 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 기쁨이 이렇게 클 줄도 몰랐다. 엄마의 마음이 이랬겠구나 싶다.
숨이 멎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엄마와 같은 의사가 필요하다. 그 다리가 된 것이 뿌듯하다. 언젠가는 내가 엄마와 같은 의사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