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Menu

단편소설

이루는 날

2024.031697
  • 글자 크기



  • #
    과연 그날이 올까?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가 걸어간 길이었기에 나도 따랐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하루아침에 가장이 된 어머니는 낮에는 밭일, 밤에는 바느질한 삯으로 우리를 키웠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도 잠자리에 들 때면 해방될 그날을 소원하며 우리 손바닥에 태극기를 그려주셨다. 그리고 싶어도 그릴 수 없었던 태극기가 어머니의 손끝에서 우리 마음에 새겨졌다. 학교를 졸업한 형과 누나는 어머니가 새겨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연해주로, 만주로 떠났다. 그사이 전세가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하나둘 변절을 선택했다.

    # D-12
    기름때에 찌든 옷 사이로 검은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자전거 정비 일을 시작한 지도 수년째. 봉급은 그대로지만 임시정부 경성 연락책 신분을 위장하기에 이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연락책이라고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립하는 날 나눠줄 태극기를 찍어서 잘 보관해 두는 것이 내 주 임무였다. 충칭에서 나를 기억하기는 할까? 중국 본토에 위치한 임시정부와의 거리만큼 독립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닌지…. 검은 땀방울처럼 어두운 생각들이 뇌리를 스칠 때, 멀리서 차 한 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와서 가게 앞에 멈춰섰다.

    ‘자전거포에 자동차라니….’

    차에서 내린 건 완요였다. 간담이 서늘했다. 한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지금은 독립군을 쫓는 일본 경찰이 된 변절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그를 모른 척하려 했지만 손이 떨렸다.

    “이봐, 도성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인사 좀 하지?”

    완요의 말투에는 여유가 넘쳤다. 다부진 풍채에 윤기가 흐르는 피부, 잘 다려진 양복이 그를 더 여유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너와는 할 말 없어.”

    “이거 섭섭하군. 그러지 말고 나랑 차나 한잔 하자고. 사장님, 이 친구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같이 다녀와도 되죠?”

    일본인 사장은 연신 “하이, 하이”를 외치며 웃어 보였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차는 시내 다방 앞에 멈췄다. 그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차 두 잔을 시켰다.

    “이렇게 보니 좋구만. 경성에서 일하는 줄은 진작 알았는데, 경찰서 일이 워낙 바빠서 말이야. 고향에 어머니도 잘 계시지?”

    “왜 날 보자고 한 거야? 설마 나도 잡아넣으려고?”

    억눌렀던 감정이 북받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완요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자네 마음은 알겠는데 여기서 조선말로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안 돼. 경찰서가 가까이 있거든. 하하하. 내가 왜 너를 감옥에 보낼 거라 생각하지? 넌 내 제일 친한 벗이자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인데. 설마 내가 동지들을 팔았다고 생각해? 그때 계획대로 그 폭탄을 터트렸으면 우리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모두 무사하지 못했어. 너도 알잖아. 폭탄 몇 개 터트린다고 독립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동지들을 판 게 아니야. 오히려 살렸지.”

    “별 궤변을 다 듣겠군. 우리가 배우고 외쳤던 조국의 독립은 어쩌고 그딴 변명만 늘어놓는 거야?”

    “좀 진정해. 나는 너를 존경해. 이건 진심이야. 그 좁아터진 벽관에 갇힌 지 3일째 되던 날, 온몸이 굳어지는데 정말 죽을 것 같았어. 그런데 너는 그때도 대한 독립을 외쳤어.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를 보자고 한 건 제안을 하기 위해서야. 독립? 그래,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나도 인정해.”

    인정한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완요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자네도 전 세계가 전쟁 중인 건 알지? 지금 인도 청년들이 영국을 위해 전장에서 싸우고 있어. 왜인지 아나? 영국이 약속한 자치권을 얻기 위해서야.”

    커피 잔만 바라보던 나는 완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눈치를 살피던 완요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 조선의 청년들도 일본을 위해 전장에 나가서 싸우고 있잖아. 그럼 우리도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해야 하지 않겠어?”

    “자치권이라도 달라고 한단 말인가? 이봐, 자치권 운운하던 자들은 일제 앞잡이가 된 지 이미 오래야. 지금 그걸 제안이라고….”

    완요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랑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 조선의 자치는 더 이상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야. 본토와 총독부의 분명한 계획이라고. 이건 조선에도 의회가 생긴다는 뜻이야. 그럼 누가 의원이 돼야 할까?”

    그는 거의 식은 차를 한입에 쏟아붓고 말을 이었다.

    “내가 볼 땐 세 부류의 사람이 있어. 첫째, 한일합병이 되자마자 나라를 등지고 작위를 받은 자들이야. 몇 석은 차지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일제에 충성하는 자들이 아니야. 기회에 충성하는 자들이지. 조선 사람도 그들을 배척하지만 총독부도 그들을 신뢰하지 않아. 언제든 기회가 되면 또 다른 이익을 찾아 떠날 자들이라는 것을 아니까. 두 번째, 조선을 위해 생각을 바꾼 지식인들도 의석을 차지할 거야. 나는 그들이 옳은 결정을 했다고 생각해. 아마 이들이 조선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겠지.”

    “그래서… 지금 나라를 등지고 권력에 빌붙어서 의원이라도 되라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어디 나라를 등질 사람이야? 절대 아니지. 말했잖아. 난 너의 꺾이지 않는 신념을 존경한다고. 나라를 처음부터 판 자들이나 버티다 지쳐서 등 돌린 지식인들이나, 조선인의 신뢰를 얻을 수는 없어. 씁쓸하지만 나도 마찬가지고. 이들로는 아직도 잔불처럼 남아 있는 조선의 독립 의지를 더 크게 이끌어낼 수 없다는 말이지. 그래서 자네와 같은 제3의 인물이 필요해. 조선을 끝까지 사랑할 충성스러운 사람들. 총독부에서 원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사람들이야. 자신의 사리사욕이 아니라 조선인을 위해 일할 사람들 말이야. 그래야 자치의 의미가 있거든. 네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총독부 조선복지과장으로 임용될 거야.”

    완요가 가죽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총독부에서 보낸 공문과 임용장이야. 여기 네 이름만 쓰면 다음 날부터 출근이지.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사람도 겨우 들어오는 총독부에 임용 즉시 과장이라니 이건 파격적인 제안이야. 네가 할 일은 조선인에게 필요한 복지 제도를 마련하는 거야. 조선인을 위해 일하면서 입지를 다지고 의회 설립 승인 후 자네 고향에서 출마하면 돼. 그리고 선출이 되면 조선인을 위한 정책들을 만들어가는 거지. 이보다 더 큰 성공이 어디 있겠나?”

    완요는 입가를 씰룩이며 자신감에 찬 눈빛으로 나를 훑어봤다.

    “넌 내가 독립운동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자전거 정비하는 일 외에는 아는 게 없어.”

    “하하하, 그런 거라면 내가 심어놓은 사람에게 들으면 돼. 알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내가 네게 원하는 건 딱 하나야. 여기 서명만 하면 돼. 그거면 충분해.”

    완요는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짚으며 소리 내어 읽었다.

    대한 독립이 당장 실현되기 어렵다면 일본제국 안에서 자치권을 얻는 것도 현실적인 해답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조선독립을 부정하거나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이 어디 있나? 오히려 현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조선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얻자는 거지. 그 중요한 일을 할 인물로, 수많은 욕을 먹어가며 자네를 추천한 거야.”

    “할 말 다 했으면 가겠네.”

    “알겠어, 알겠어. 오늘 당장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어. 대신 꼭 생각해 봐. 나는 조선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 한 주 정도 시간이 있으니 13일 저녁까지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다방을 빠져나왔다. 거리는 밝게 빛났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밤이 되면 고요해지는 나의 공간과는 사뭇 다른 세상. 희미한 불빛 아래서 숨죽여 태극기를 찍어내는 내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 화려하고 밝은 거리를 벗어나 조용하고 적막하기까지 한 나의 세상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하면 안 될 고민을 하면서….

    # D-9
    어김없이 해는 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머니를 떠올렸다. 며칠 전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무의식 저편에 자리한 자아가 계속 내게 속삭였다.

    “이봐, 좀 쉬었다 하지 그래. 볕이 너무 뜨거워.”

    동료의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내면의 소리에서 도망치려 일만 했다. 저녁이 되자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졌다. 녹초가 된 나는 단칸방에 몸을 뉘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태극기 목판과 그 목판으로 찍어서 켜켜이 쌓아둔 태극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 때 만세 운동을 하며 사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던 일이 떠올랐다. 태극기를 받고 함께 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 본 척 지나치거나 괜한 소동 일으키지 말라며 호통을 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일본인도 섞여 있어서 나와 군중을 향해 경멸의 말을 쏟아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만들어둔 태극기를 보자기에 쌌다. 태극기가 거리를 가득 메울 순간을 그리며 태극기를 감추려고 파 둔 토굴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을 자랑스럽게 추억할 그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그날 밤, 집으로 호승이 찾아왔다.

    “임시정부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호승은 조만간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한다는 정보와 함께 작전에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러 오늘 밤 두 명이 한강 포구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와 호승은 그들의 길 안내를 맡았다. 밖에는 장대비가 세차게 내렸고 포구까지는 십 리가 넘는 산길이었다. 나는 경찰이나 일본군에게 발각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가자.”

    포구에 도착하니 강물이 불어나 있었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힐세라 나는 크게 소리쳤다.

    “혹시 발각되면 동지들을 데리고 무조건 도망가!”

    “그런 말 마십시오. 형님이랑 꼭 같이 갈 겁니다.”

    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호승을 쳐다봤다. 호승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 목선이 보였다. 포구에 들어온 목선을 끌어다 숲속에 숨긴 후에야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형님과 누님이 꼭 안부 전해달라고….”

    탕! 총성이 울렸다. 경찰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시선을 끌 테니 빨리 도망치십시오. 호승아,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 어서!”

    나는 강가로 발길을 돌려 필사적으로 뛰었다. 하지만 빗길에 발이 미끄러지며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순사들이 순식간에 덮쳤다.

    형무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하 심문실로 끌려갔다. 수많은 사람을 할퀴고 찔렀을 연장들에서 지독한 피비린내가 났다. 순사들이 나를 거칠게 의자에 앉혔다.

    “오랜만이군.”

    고문 기술자라고 불리는 놈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차피 한 번에 안 불 거잖아? 우리 뭐부터 할까?”

    그가 벽에 걸린 도구들을 만지작거리자 철 부딪히는 소리가 끔찍하게 들렸다. 그는 퍼렇게 날 선 작대기 하나를 고른 뒤 내 앞에 앉아 서류를 들추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아, 형식적으로라도 물어보고 시작해야겠지? 어제 같이 있던 세 명은 어디 있지?”

    붙잡히지는 않았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모른다.”

    “그렇지! 그렇게 말해야지. 그럼 이제 내가 기억나도록 해주지. 네가 오른손잡이였나? 왼손잡이였나? 아, 오른손잡이였지.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왼손부터 하자. 작성할 서류들도 많으니까. 어이, 꽉 잡아. 지난번처럼 놓치지 말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순사가 내 손을 잡아채 손이 부서져라 눌렀다.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이 손끝에 느껴지는 순간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때였다.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완요였다.

    “너는 언제까지 무식하게 고문이나 할 거냐. 내 친구가 그런다고 말할 사람인 줄 알아?”

    완요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로 고문 기술자의 머리를 툭툭 쳤다.

    “심문은 내가 한다. 데리고 와.”

    완요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었다. 나는 간수에게 이끌려 지하실에서 나와 해가 드는 2층 접견실로 갔다. 죄수들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완요는 친절하게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여기 앉아. 얼굴이 이게 뭐야. 무식한 놈들 같으니라고.”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내가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나? 정보는 밀정을 통해 알 수 있다고. 광복군 진입작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세부계획까지 꿰고 있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도망간 셋 중에 밀정은 없으니까.”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 무력감은 독립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되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내가 아무리 경무국*에서 일하고 있어도 여기서 널 빼내줄 힘은 없어. 하지만 내가 했던 제안은 유효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결정하면 여기서도 나갈 수 있어. 기소되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거절하면… 최소 20년은 살아야 할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완요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약속한 날 다시 오겠네. 그 전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패통**을 쳐. 그럼 바로 나갈 수 있으니까.”

    완요가 돌아가고 간수는 나를 감방으로 데려갔다. 방 안에는 미결수 두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은 젊은이였다. 그는 몸을 벽에 기댄 채 얼빠진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늙은이였다. 바짝 마른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고 연신 마른기침을 해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빛났다. 노인은 낡은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벽에 기대어 있었다. 뜨거운 햇볕이 창을 통과해 감방으로 쏟아졌기에 나도 피신할 벽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나는 노인이 기댄 벽을 골랐다. 노인은 나를 보며 말없이 웃었다.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지글지글 타는 볕 때문에 감방은 찜통이었다. 그때 앞에 있던 청년이 무언가를 다짐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큼성큼 패통 앞으로 다가갔다. 노인이 말했다.

    “정말 가려나?”

    그 말에 청년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만, 그만! 더 이상 선생님 말씀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사는 겁니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이렇게 죽어가는 게 사는 거냐고요? 저더러 형무소에서 10년을 썩고, 나가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서 언제 재판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살라고요? 그런 미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힘껏 패통을 쳤다. 간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그제야 이 방의 의미를 알았다. 옆에 앉은 노인은 완요의 제안을 거절한 20년 후의 내 모습이었다. 청년은 분명 나와 똑같은 제안을 받았을 터였다. 그리고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다짐했을 것이다. 저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청년이 나가자 노인은 슬픈 낯빛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나는 청년이 앉았던 벽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밤이 되었다. 자고 싶지만 잠들 수 없었다. 귀에는 모기가 시끄럽게 덤벼들었고, 벼룩이 온몸을 물어뜯었다. 똥통 끓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허기진 배는 아우성을 쳤다.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처절한 내 처지에 화가 나는지, 완요의 제안을 자꾸 떠올리는 내 마음에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패통을 쳐다봤지만 차마 일어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날이 밝았다.

    # D-3
    노인과 나는 옷감과 실을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다. 기계 열기에 몸이 익는 듯했지만 물 마실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돼서야 겨우 허리를 폈다. 며칠이 지났다. 공장에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것도, 운동이랍시고 벽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운동장에서 제자리를 도는 것에도 분노가 솟구쳤다.

    ‘완요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이렇게 갇혀 있는 게 독립에 무슨 도움이 되지?’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가슴속 두 자아가 매 순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손을 검게 물들인 염색약은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노인과 나는 마주 보고 벽에 기대앉았다. 여전히 마른기침을 하며 성경을 읽던 노인이 책을 덮고 무릎을 꿇었다.

    ‘저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모든 것에 싫증이 났고 노인의 기도하는 모습조차 보기 싫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들 수 없었다. 또다시 귀에는 모기가 어지럽게 날아다녔고, 이와 벼룩 때문에 온몸이 가려웠다. 코에는 여전히 똥통 끓는 냄새가 진동했고, 끼니를 놓친 배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 반복이었다. 이런 답도 없는 삶을 앞으로 계속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패통 앞에 섰다. 며칠 전 패통 앞에서 숨을 씩씩 몰아쉬던 청년처럼 나도 숨결이 거칠어졌다. 지금까지 억눌렀던 자아가 또 속삭였다.

    ‘그래, 패통만 치면 자유다. 독립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가자.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자.’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 형, 누이 그리고 어머니가 내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뜨거움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자네도 가려고?”

    자는 듯했던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갈 때 가더라도 나랑 얘기나 좀 하세. 혼자 있으면 꽤 쓸쓸하거든. 자네가 살아온 이야기 한번 해보게나.”

    형무소에서는 죄수 간의 대화를 엄격히 금하지만 이 방은 달랐다. 자유롭게 말해도 간수가 간섭하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여유였으리라. 기약 없이 갇혀 있는 노인을 보고 뛰쳐나갔던 청년처럼 말이다.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지난 삶을 이야기했다. 노인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서명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현실을 인정하고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거죠.”

    노인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글은 독립을 부정하는 거라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한 독립 만세라니. 참 별나지 않은가? 새벽이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마치 날이 밝은 듯 대한 독립을 외치다니 말일세.”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노인의 생각이 궁금했다.

    “우리가 소원하는 해방은 독립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거라네. ‘독립이 올까?’ 하는 의심을 품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지. 그래서 일제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깨려고 약은 술책을 쓰는 걸세. 확신이 꺾이면 다음은 자연스럽게 무너지거든. 작은 구멍 하나가 둑을 무너뜨린다는 걸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선생님도 독립운동을 하셨습니까?”

    “난 지금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네.”

    노인은 당차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수복을 입고 갇혀 지내는데 무슨 독립운동을 한단 말인가?

    “나도 자네처럼 패통을 치려고 했던 때가 있었지.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때 마치 내가 뭘 하려는지 안다는 듯 옆방에서 타벽통보법***으로 나를 일깨워 주더군.”

    나는 숨을 죽이고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고.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어. 대한 독립은 진리니까 반드시 이루는 날이 올 거라 확신했거든.”

    독립을 이루는 날! 나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기약도 없는 그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생님. 독립이 이뤄질 것 같은 순간은 많았습니다. 기미년 만세 운동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몇 해 뒤의 만세 운동은요? 만주에서 치렀던 수많은 전투와 목숨 바쳐 희생했던 사람들은요? 모두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버렸습니다. 내년에는, 또 그다음 해에는! 매년 그렇게 독립을 외쳐온 세월이 얼마입니까. 수많은 외침 속에 죽어간 영혼들이 그렇게 많아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도대체 그날이 온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노인은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독립운동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싸우고 외치고 전하는 것이네. 총을 쏠 줄 모르면 총탄을 나르고, 굶주려도 알뜰히 모아서 군자금에 보태고, 하다못해 하나님께 독립을 위해 기도라도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독립운동일세.”

    “그럼 독립이 언제 됩니까? 선생님은 그날이 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13일 저녁까지만 생각하렵니다.”

    “날짜는 중요하지 않아. 기일을 정하고 정한 때까지만 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날은 이루는 날이 아니라 ‘이뤄지기를 바라는 날’이 돼 버리지. 그런 정신으로는 더 이상 기도할 이유도, 독립운동을 할 명분도 찾을 수 없게 돼. 하지만 자네가 독립운동을 하든 하지 않든 그날은 반드시 온다네.”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창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우리 외침과 희생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지만… 아니네. 그 함성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아직 다 채워지지 못한 것뿐이야. 아직 그날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의 마음과 정성이 부족한 탓이지.”

    이야기를 마친 노인은 자리에 앉아 성경을 펼쳤다.

    “내가 할 말은 다 했네. 선택은 자네에게 달렸지. 지난번 그 청년에게도 나는 같은 말을 해주었지. 내가 자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제 기도뿐이네.”

    # D-2
    태양이 뜨겁게 작열했다. 공장은 기계 열기로 더 뜨겁게 달궈졌다. 반복되는 고된 노동으로 녹초가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완요가 굳이 저녁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이 때문인 듯했다. 간수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 노인은 방을 나서는 나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접견실 문을 열자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완요가 몸을 일으키며 나를 맞았다.

    “패통을 치지, 지금까지 그 안에서 무슨 고생이야. 일전에 나간 그 청년은 지금 총독부에서 일하는 중이야. 며칠 안 됐는데 아주 신수가 훤해졌어.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다니까. 너도 빨리 적고 나가자. 나가서 고기 국밥 한 그릇 하자.”

    “잠깐 자리 좀 비켜줘.”

    완요는 호탕한 목소리로 천천히 살펴보고 적으라 하고는 서류와 펜을 두고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서류를 넘겨보다 가만히 펜을 들었다.

    “다 적었나?”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완요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류를 읽던 완요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그래, 어디 한번 철창에서 평생 썩어봐! 미련한 놈.”

    완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놈이랑 그 노인네. 일반 감방으로 옮겨.”

    나를 노려보던 완요는 옆에 있던 간수에게 신경질적으로 지시한 뒤 문이 부서져라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간수들이 나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나는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옮겨진 방에는 50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냄새는 더 지독했고 모기와 벼룩은 더 들끓었으며 방이 좁아 제대로 몸을 누일 수도 없었다. 간수들은 말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곧바로 창살을 거칠게 쳐댔다. 사람들 사이에 노인이 보였다. 노인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 D-day
    새벽 공기가 산뜻했다. 쪼그리고 잤더니 사지가 쑤셔서 기지개를 켰다. 철문 열릴 시간이 지났는데 조용했다. 그때, 멀리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아득하게 들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성은 점점 커졌다. 감방 안이 술렁이는 것을 보니 나만 들리는 건 아닌 듯했다. 함성은 이내 천지를 진동하듯 쩌렁쩌렁 울렸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귀를 대더니 확신에 찬 얼굴로 목청껏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노쇠한 몸에서 어떻게 그리 큰 소리가 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이윽고 노인을 바라보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서로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가슴에서 솟아나는 뜨거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만세를 외쳤다. 더 크게, 더 힘차게. 잠시 후 옥문이 열렸다. 갇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형무소 정문을 향해 만세를 외치며 당당히 걸어갔다. 철문이 열렸고 거리는 온통 태극기의 물결이었다. 고독과 인고의 방에서 찍어낸 태극기들이 마침내 환한 빛을 받으며 하늘 높이 펄럭였다. 인파 속에서 어머니가 보였다. 나는 곧장 어머니께 달려가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다. 어머니는 내가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향을 떠나왔다고 했다.

    “어머니, 해냈습니다. 드디어 해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나를 토닥여 주었다.

    “장하다, 우리 아들. 얼마나 힘들었니. 자랑스럽다. 장하다!”

    어머니는 환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

    “여러분, 여러분이 들고 있는 태극기는 제 아들이 긴 세월 피땀으로 찍어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마침 한 아이가 내게 태극기를 건넸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노인이 말했다.

    “자네가 크게 외치게!”

    군중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꿈에서도 외치고 싶었던 그 말을 토해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땅을 울린 함성은 온 거리를 가득 메웠고 우리는 경성 대로를 행진했다. 총독부 근처에 다다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며칠 전 패통을 치고 나갔던 청년이었다. 양복을 멀끔히 차려입은 그는 땅에 주저앉아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틀 전 완요의 제안을 수락했다면 나도 저 청년과 같은 처지가 됐을 테니까. 그날의 선택을 저주하며 평생 후회하며 이를 갈았을 것이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모두의 환대 속에 어머니와 나는 고향에 돌아왔다. 아이들은 독립운동 이야기가 듣고 싶다며 매일 집으로 찾아왔고, 나는 거리에서 태극기를 나눠주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부터 독립이 되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얼마 후, 나는 길었던 귀향의 여정을 써 내려갔다. 글의 말미는 흔들리던 나를 붙들어 준 말로 끝맺음했다.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속한 행정 조직으로 조선에서 경찰과 치안 관련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
    **교도소에서, 재소자가 용무가 있을 때 담당 교도관을 부를 수 있도록 벽에 마련한 장치.
    ***감옥의 벽을 두드려 수감자들끼리 의사소통하는 방법.
    더 보기
    뒤로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