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 학기 시작과 함께 실습 나갈 병원과 실습자 명단이 물리치료학과 게시판에 붙었다. 발표를 기다리던 승재와 민수도 모여든 학생들 틈에서 목을 길게 빼고 공고문을 응시했다. 실습일정을 확인하던 승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저 병원! 실장님이 무섭기로 소문난 데 아냐?”
“맞네. 작년에 과제를 부실하게 했다고 실습생 여럿 쫓겨났던 병원이잖아. 모두들 실장님 찾아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지 아마.”
‘드르르, 드르르르’
때마침 승재 휴대폰이 울렸다. 승재는 알람을 끄며 민수에게 말했다.
“나 아르바이트 가. 오늘부터 두 시간 더 일하기로 했어.”
승재의 말에 민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일을 더 한다고? 이제 곧 실습도 있고, 국가고시도 준비해야 하는데 어쩌려고 그래? 실습 나가면 실습비도 나오는데 아르바이트 그만두면 안 돼? 넌 부모님이 용돈도 주시잖아.”
“걱정 마, 친구! 이제 편의점 일은 내 일상이야. 호흡 같은 거라고.”
승재는 민수의 걱정도 이해가 됐지만 자신에게 편의점 일이 일상이라는 말도 과장은 아니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시작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이제 눈 감고도 척척 해낼 정도로 익숙했기 때문이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자립심을 기르려는 목적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 충족과 폭넓은 대인관계 유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이만한 아르바이트가 없다는 걸 깨닫고 줄곧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민수의 걱정을 뒤로한 채 학과 건물을 빠져나온 승재가 시간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긴 곳은 동아리 건물이었다. 3학년 학기 시작과 동시에 동아리 활동을 중단한 민수와 달리 승재는 4학년 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정규 모임은 물론 사교 모임까지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덕분에 후배들 사이에서 간식 잘 사주는 프로 참석러 선배님으로 통했다.
#2
일요일 저녁, 승재는 벌써 30분째 편의점 컴퓨터와 씨름 중이었다. 두 시간 전에 입력한 재고 조사서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이 참,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승재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개강과 동시에 시작된 병원 실습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과제물을 쏟아냈고,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질수록 승재의 짜증은 점점 더 늘어갔다. 벌써 이틀째 조별과제에 필요한 학술자료를 찾느라 승재는 밤을 꼬박 새운 상태였다. 오후 5시 40분. 입력 마감까지는 아직 1시간 20분이 남아 있었다. 승재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재고 현황 프로그램을 열었다.
“계산요.”
몇 줄 입력하지 않아 밖에서 점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 보던 승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마감시간 안에 입력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사장님 부탁을 거절하는 게 옳았다는 후회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 때쯤 매장 전화벨이 울렸다.
“승재 씨, 어떡하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사장님의 목소리에 승재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미안할 때 튀어나오는 사장님 특유의 말투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으응, 사고가 났어. 내 차는 아니고, 터널에서 추돌사고가 났나 봐. 도로가 완전 주차장이야. 오늘 저녁에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 아는데 약속 시간을 조금 뒤로 미룰 수 있어?”
평소라면 사장님 편의를 봐드렸겠지만 오늘은 승재도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의 의미를 깨달은 사장님이 이내 쿨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힘들겠지? 가게 문 잠그고 가요. 내가 최대한 빨리 가 볼게.”
“죄송해요, 사장님. 이번 과제는 제가 발표자라….”
“승재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이유야 어찌됐든 약속 시간을 못 지킨 건 나니까.”
승재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사장님 말투는 조금 전과 확연한 온도 차가 느껴졌다.
“재고 조사 입력은 끝냈어요?”
통화를 마무리하려던 사장님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게…. 죄, 죄송해요. 재고 내용 입력하고 분명히 저장했는데, 보고하려고 파일을 찾으니까 감쪽같이 사라진 거예요. 다시 하려고 했는데 매장에 손님들이 너무 몰려서….”
“어머! 본사에서 재고 회수 때문에 특별히 실시한 거라 기일 엄수해 달라는 공문까지 따로 보내왔는데…. 시킨 일을 못 했으면 매장 문을 잠그고라도 그 일을 먼저 처리했었어야지.”
수화기를 타고 오는 짜증과 냉기에 승재도 불쑥 화가 치밀었다. 사실 오늘은 승재의 근무 날이 아니었다. 며칠 전, 말없이 일을 그만둔 아르바이트생을 대신해서 사장님 편의를 봐준 것이었으니까.
“손님들이 몰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승재 목소리도 덩달아 퉁명스러워졌다. 입력 시간을 놓치긴 했지만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니라 매장 일을 하느라 그렇게 된 건데, 결과만 보고 막무가내로 몰아세우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의 우선순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사장님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잰걸음으로 어두컴컴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과 건물로 향하던 승재는 테니스 코트에서 훈련 중이던 동아리 후배들이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시계를 봤다. 곧바로 가도 모임 시간까지 빠듯했다. 그렇다고 후배들을 모른 체할 수도 없었던 승재는 후배들과 건성건성 인사하는 것으로 자리를 마무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7시 36분. 강의실 안 공기가 싸했다.
“혼자 인기 관리 너무 하는 거 아냐? 우리도 다 바쁜 사람이거든.”
승재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정민의 목소리가 날아와 승재 귀에 꽂혔다. 후배들과 헤어진 후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던 승재는 지각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자리에 가서 앉았다. 다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말을 아꼈다. 승재의 합류로 팀원이 다 모이자 각자 준비한 자료를 팀원에게 나눠주고 조사한 내용을 한 명씩 돌아가며 발표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승재는 발표를 듣는 내내 감기는 눈꺼풀과 흐려지는 의식을 붙드느라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3
텅 빈 치료실, 승재는 리포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식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시간이지만, 오늘은 오후에 있을 발표 준비로 점심도 건너뛴 상태였다. 예정에 없던 모임과 약속이 연이어 생겨서 자료 취합을 차일피일 미룬 탓에 승재는 리포트를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발표 기일이 임박해서야 팀원들이 조사한 자료를 정리하며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두 달 전, 사전 모임 때 이미 설명을 들은 상태였어도 당시 졸음과 사투하며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승재의 기억에 그날의 내용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발표 준비는 잘 돼가? 밥은 먹고 하지.”
언제 왔는지 민수가 손에 든 음료 중 하나를 승재에게 건네며 물었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던 승재는 시계를 올려다봤다. 12시 30분. 3시에 있을 발표까지는 아직 여유가 좀 있었다. 살펴봐야 할 내용도 제법 남아 있었지만 잠깐의 휴식은 가져도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외울 내용이 많네. 너 혹시 현수가 준비했던 주제 기억나?”
승재는 민수가 건넨 음료의 뚜껑을 따며 물었다.
“응, 만성 뇌졸중 환자의 보행 특성에 대한 거였잖아. 특히 장애물에 대한 대처와 운동치료는 관심 있게 들었어. 시골 갈 때 외할아버지께 해드리려고.”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에 자판기에서 음료 나오듯 소주제까지 줄줄 꿰고 있는 민수가 승재는 신기했다.
“네가 준비한 내용도 아닌데 어떻게 세부적인 것까지 다 기억해? 대단하다!”
“대단하기는…. 뇌졸중 환자 치료는 물리치료의 핵심 중의 핵심인데 그 정도는 기본이지. 더구나 팀원이라고 해봐야 6명밖에 더 되니? 당연히 숙지하고 있어야지. 너는 오늘 발표자라 더 잘 알면서 뭘 그러냐?”
“그, 그렇지.”
민수의 말에 승재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음료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발표 시간이 다가올수록 ‘오늘 발표 기대할게요’라며 상기된 얼굴로 승재에게 엄지를 추켜세워 보이던 실장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실장님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해도 좋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