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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새 아침의 여명 上

2021.0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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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민국아, 이리 좀 나와 봐라.”

    아버지는 방에 있는 아들을 불렀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아들 민국이 거실로 나왔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이제 막 ‘나는 대한민국 광복군이다’라는 서두 자막이 뜬 역사 다큐멘터리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여기 앉아서 저것 좀 봐라.”

    3인용 소파 한쪽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으레 있는 일인 듯 민국은 별 대꾸 없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야기는 일본군으로 강제 징용됐던 학도병 중 처음으로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 학도병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내레이터는 명료하고 절제된 톤으로 해설을 이어갔다.

    탈출에 성공한 학도병은 뒤이어 탈출한 학도병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운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 들어가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일행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해발 3천 미터의 험준한 산맥을 넘는 6천리 장정에 올랐다. 난양(南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충칭까지 가는 길목에 가로놓인 파촉령은 제비도 넘지 못하고 제갈공명도 넘기를 꺼렸다는,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파촉령을 벗어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사지가 얼어붙는 설산의 행군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행은 “잠들면 죽는다”,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서로를 다그치며 천고의 설령을 넘었다. 조선인 탈출 학도병 1호는 한복을 입은 어머니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1945년 1월 31일, 마침내 일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일행의 대장정은 연합군에 널리 알려지며 한국인의 강한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도 높여주었다.

    “…탈출 학도병에서 대한민국의 광복군 장교가 된 그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광복군이며 민족의 스승이었다… 이제 그가 장정을 끝낸 자리에 우리가 가야 할 장정이 남아 있다.”

    내레이터의 마지막 멘트로 60여 분의 역사 다큐멘터리는 끝이 났다.

    민국은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낸 의도를 알았다. 해병대 장교 출신으로 평생 군대에 몸담고 살아온 아버지는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TV교양 프로그램은 유용한 수단이었다. 특히 독립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여지없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의지가 단호해서 민국은 사춘기 시절에도 아버지의 부름에 반항해본 적이 없었다.

    독립군에 관한 내용은 민국에게도 감동적이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제 또래 학생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선대의 치적이 크고 감격적이라 해도 영원한 광복군, 민족의 스승 시대는 지났다.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대사처럼 지금은 조상들이 후손에게 남긴 유산을 마음껏 ‘누리면’ 되는 거였다. 어차피 조상들도 후손의 편안함을 위해 그 모진 고초를 당한 것이 아니었던가.

    아버지도 아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조상의 은덕은 모른 채 편한 것에만 길들여져 힘든 것이라면 조금도 참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전우회에서 자주 나왔다. 아들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도 잘 알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가장 크게 신경전을 벌인 것은 오토바이 문제였다. 군인 아버지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여러 번 다녀야 했던 민국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오토바이를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로 삼았다. 민국의 오토바이 엔진 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으르렁거렸다.

    어느 아버지라고 좋아할까마는 법을 지켜야 할 국민의 의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버지로서는 도로를 겁 없이 질주하며 경찰들을 농락이라도 하듯 쫓고 쫓기기를 즐기고, 교통 체증과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무리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아들이 그런 무리와 함께 다니는 것을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도 민국을 오토바이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민국아, 제발….”

    어머니의 애원조차,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 어떤 스트레스도 확 날려버리는 듯한 그 자유로움을 내어주게 만들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오토바이는 여전히 민국의 애마였다.


    #2
    입영 통지서를 앞에 두고 민국은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지?’

    아버지는 아들이 해병대에 들어가길 바랐다. 사실 민국도 그러고 싶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민국은 체력이 좋은 편이었고 모험심도 강했다. 본인의 의지가 있으면서도 망설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아버지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게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기가 싫었다.

    고민 끝에 민국은 그대로 해병대 입대를 결심했다. 같은 길이라 해도 아버지와 자신의 삶이 같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입대하는 날, 부모님은 훈련소까지 따라나섰다. 차 안 분위기는 어두웠다. 어머니는 울음을 삼키느라 말이 없었고, 아버지 역시 운전하는 내내 조용했다.

    서둘러 온 덕분에 일찍 도착한 가족은 훈련소 부근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모처럼 온 가족이 마주 앉은 식사 시간, 아버지는 말없이 생선 살을 발라 아들의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었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민국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훈련소 앞 광장에 도열한 입소자들은 멀찍이 선 부모님들을 향해 외쳤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민국의 눈에 울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아버지는 미동도 없이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민국은 얼른 몸을 돌려 조교의 구령을 따라 열 맞춰 걸어가는 훈련병들 사이로 들어갔다.


    #3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극기주 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때였다. 운명의 장난치고는 가혹했다. 아버지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폭주족이 탄 오토바이에 치어 쓰러졌다.

    운전자는 바로 뺑소니를 쳤고 새벽에 운동하러 나가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 목격자도 없었다. 뒤늦게 발견된 아버지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어 할 수 있는 모든 응급처치를 했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경과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깨어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즈음, 민국이 속한 이동 대오는 어둠 속에서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삐! 호각 소리가 짧게 울리며 훈련병들의 긴장을 바짝 조였다. 달은 구름에 묻히고 선두의 플래시가 낮은 조도로 진행 경로를 비추었다. IBS훈련(Inflatable Boat Small·소형 고무 보트를 이용한 상륙기습기초 훈련)은 교육 과정에서 고되기로 소문난 훈련 중 하나였다.

    여덟 명이 한 덩어리가 된 훈령병들의 머리 위에는 백 킬로그램이 넘는 고무보트가 얹혀져 있었다. 거기에다 등에 진 장비들까지 어깨를 짓눌러 몸이 땅으로 꺼져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훈련이 지속될수록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다리 무게는 천근만근으로 불어났다. 집합 때 입은 복장은 땀과 먼지와 소금기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그래도 참을 만했다. 일명 ‘지옥주’라 불리는 일주일간의 ‘극기주’ 훈련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간의 본능 중 가장 참기 힘들다는 수면욕을 극복하는 무수면(無睡眠) 훈련이 그것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눈을 뜬 것과 눈을 감은 것, 깨어 있는 것과 자고 있는 것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밤새 걸어온 산길과 모래 길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일주일 가까이 벗지 못한 군화 때문에 온 발을 휘어감는 통증도 견디기 힘들었다. 체력의 한계점에 이른 민국은 더 이상 중심을 지탱할 수 없었다.

    “잠들면 죽는다! 일어나!”

    교관의 칼 같은 목소리가 민국의 등에 꽂혔다. 민국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민국아, 어서 일어나! 어서!’

    저만치서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민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의 떠미는 힘에 민국은 몸을 일으켰다. 정한필 훈련병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훅 스쳐갔다.

    민국은 머리를 흔들어 사방에서 죄어 들어오는 잠을 털었다.

    ‘잠들면 죽는다….’

    민국은 속으로 되뇌었다. 캄캄한 어둠 속, 대오는 산길을 톺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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