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영준은 벌써 한 시간째 의자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다. 휴일에도 장사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영숙이 두 동생을 돌본다. 친구를 몰고 다니는 영준 때문에 영숙은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영미를 보는 것도 만만치 않다. 항상 자신의 주위를 맴돌아 신경이 많이 쓰인다. 다행히 동생들을 얌전하게 만들 묘책을 영숙은 알고 있다. 바로 그림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영숙으로서는 도랑 치고 가재도 잡는 셈이다. 영숙의 얼굴이 스케치북 뒤로 사라지자 영준은 온몸을 비틀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하지만 섣불리 의자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슥슥 삭삭. 영숙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영준의 얼굴이 그대로 복사되어 있다. 영준이 귀여워서 혼자 웃던 영숙은, 수채화 물감을 만지작거리며 옆에 서 있는 영미를 흘끗 쳐다본다. 영준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망부석처럼 줄곧 옆에서 지켜보는 영미가 괜히 신경 쓰인다.
“자, 다 됐다.”
자신의 그림을 받아 든 영준의 입이 귀에 걸렸다.
“우아! 누나 진짜 잘 그린다. 완전 나랑 똑같아! 애들한테 자랑하고 올래.”
말릴 겨를도 없이 영준이 그림과 함께 사라지자 꿈쩍도 않던 영미가 슬금슬금 의자에 가서 앉는다.
“언니, 나두….”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도구를 정리하던 영숙은 영미의 부탁이 살짝 귀찮다.
“영미야, 나중에 그려줄게. 언니가 지금 많이 피곤해. 알았지?”
“치, 저번에도 영준이만 그려줬잖아. 나중에 그려준다고 하고 맨날 안 그려주고!”
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영미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어 있다.
“그건… 영준이가 너무 별나게 노니까. 됐어! 암튼 지금은 안 돼.”
단호한 영숙의 말에 영미는 서러움이 차오른다.
“언니 나빠.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영미가 밖으로 나가며 현관문을 쾅 닫는다. 영숙은 지난번에도 영준만 그려준 게 마음에 걸렸지만 혼자 있는 지금의 고요함 또한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무했나? 이따가 들어오면 그려줘야겠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영숙의 평화는 너덜너덜해진 그림을 들고 등장한 영준으로 인해 완전히 깨진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준은 누나의 그림 실력을 알아봐준 친구들에게 일요일에 오면 누나가 그림을 그려줄 거라고 했다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뭐? 너는 누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누나 이번 주에 대회가 있어서 안 돼.”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헤헤.”
영숙은 혼나도 금방 풀어지는 영준이 편하다. 영미는 달랐다. 영숙이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눈물을 보이는 통에, 웬만하면 영미에게는 화내지 않으려 애썼다. 게다가 요즘은 사춘기인지 툭하면 울고 예민하게 굴어서 상대하기 피곤하다.
거실에 걸린 괘종시계가 일곱 번 울린다. 영숙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영미가 슬슬 걱정된다.
‘엄마 가게에 갔겠지. 저번에도 그랬으니까….’
영숙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영준이가 어질러놓은 블록을 정리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거기 마영미 학생 집 맞습니까? 여기 경찰서입니다. 마영미 학생이 뺑소니 사고를 당해서 시내 대학 병원에 있습니다. 보호자분은 지금 빨리 병원으로 와주세요!”
경찰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영숙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파도가 되어 덮쳐왔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영숙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누나, 왜 그래. 누나!”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영숙의 모습에 영준이 깜짝 놀라 영숙의 팔을 흔들며 소리친다. 영숙은 영준의 목소리가 아득하기만 하다.
며칠 뒤, 낮게 깔린 집 안의 공기가 순녀의 숨길을 따라 조금씩 흔들린다.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운 순녀의 모습은 진액이 다 빠진 낙엽처럼 금세 바스러질 것 같다. 오늘도 영준은 이웃집 아주머니가 챙겨다준 밥과 반찬으로 아침을 먹고 등교를 준비한다. 신발을 신으려던 영준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서 엄마 방 문을 연다.
“엄마…, 큰누나 학교 안 간대. 밥도 안 먹어….”
돌아누운 순녀의 귀에 울음 섞인 영준의 목소리가 유리 파편처럼 촘촘히 박힌다. 집을 나서는 영준의 발자국 소리에 순녀의 짓무른 눈가가 다시 눈물로 젖는다.
낮 12시. 괘종시계가 정체된 공기에 파동을 일으키며 정오를 알린다. 가슴에 얹힌 돌덩이가 순녀를 무섭게 내리누르지만 순녀는 끝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밥을 물에 말아 억지로 삼킨다. 영미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무언가를 목으로 넘긴다는 것조차 죄를 짓는 것 같지만, 순녀는 살아야 했다. 가슴에 묻을 자식은 영미 하나로 족했기에. 순녀는 조용히 영숙의 방문을 연다. 침대 모서리에 기댄 채 잠든 영숙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다.
‘가여운 것….’
순녀는 자기보다 더 까칠해진 영숙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순녀는 안다. 영숙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그림 도구로 어질러진 방에는 조금 전까지 그림을 그린 흔적이 있다. 순녀의 시선이 이젤에 얹힌 그림에 머물자 눈시울이 다시금 붉어진다.
‘영미야….’
영미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영숙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학교도 가지 않고 날마다 똑같은 그림만 그렸다.
#5
혜란은 엄마가 그런 아픔을 겪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영미가 그렇게 가고, 니 엄마도 마음의 병을 얻어부렀지. 그랴서 학교도 못 댕기고….”
환하게 웃는 영미 얼굴이 순녀의 눈물방울로 얼룩진다.
“에구, 주책맞게….”
순녀는 그림에 떨어진 눈물을 얼른 털어낸다.
“엄마는… 항상 밝아서 그런 아픔이 있는 줄 몰랐어요.”
“원래 니 엄마도 지금처럼 밝지는 않았제. 첫째라 말도 없고 무뚝뚝해가지고…. 근디 성격이 완전히 바뀐 거여.”
순녀는 엷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영미 그렇게 보내고 니 엄마가 나한테 뭐라고 헌 줄 아냐? 누구한테든, 특히 가족한테는 더 잘해야겠다고 그럈지. 그 일이 어린 맘에 한이 된 거여. 에휴, 불쌍한 것.”
할머니의 슬픔이, 엄마의 아픔이 혜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혜란은 여전히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순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이젠 괜찮혀! 그만 정리허고 내려가자.”
순녀는 귀한 보석이라도 다루듯 그림들을 차곡차곡 다시 상자에 넣는다.
“나 빼고 무슨 비밀 얘기라도 했어?”
교복을 옆에 두고 고구마를 먹던 영숙이 2층에서 내려오는 순녀와 혜란을 쳐다본다.
“그랴. 너 빼고 혜란이랑 비밀 야그 했제.”
순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근디, 교복은 왜 안 입었데?”
“에휴, 역시 교복은 학생이 입어야 해. 지퍼도 안 올라가고 재킷도 안 잠겨, 그래서 포기!”
영숙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본 혜란은 마음이 아프다. 밝은 웃음 뒤에 감춘 엄마의 슬픔이 그제야 보였기 때문이다. 혜란은 잠시 머뭇거리다 영숙의 옆에 가서 앉는다.
“엄마.”
“왜, 엄마 딸.”
“그 교복 내가 한번 입어봐도 돼?”
“혜란이가? 정말? 엄만 너무 좋지.”
순녀는 혜란이 교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좇다 영숙에게 시선이 머문다. 혜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숙의 눈가가 촉촉하다. 잠시 후, 혜란이 교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교복을 입은 혜란의 모습이 눈부시다. 영숙의 가슴속에서 파도가 일렁인다. 영숙은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순녀도 혜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옛날 교복 치고는 예쁘긴 하다. 근데 엄마 좀 뚱뚱했었구나! 이거 봐. 나한테는 완전 월남치마네.”
혜란은 펑퍼짐한 치마를 두 손으로 쫙 펴고는 한 바퀴 빙 돌았다. 영숙은 혜란이 예전의 밝고 명랑한 모습을 되찾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이제 다시는 저런 모습을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영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혜란을 품에 안는다.
“혜란아, 고마워.”
“엄마…. 미안해.”
그날 밤, 영숙과 혜란은 나란히 평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여기는 별이 참 많네.”
“엄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솔직히 엄마가 나 살린 건데…. 미안해.”
“엄만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에이, 거짓말.”
“진짜야. 혜란이랑 이렇게 있으니 너무 행복해서 힘들었던 건 벌써 다 잊었어.”
둘은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혜란아, 아까 할머니한테 이모 이야기 들었어?”
“어? 응. 영미 이모. 나랑 너무 닮아서 좀 놀랐어.”
“그치? 아마도 하나님께서 영미한테 못 해줬던 거 갚으며 살라고 너를 선물로 보내주셨나 싶어. 영미 이모 그렇게 가고 엄마가 깨달은 게 뭔지 아니? 정말이지 사람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 언젠가는 모두 떠날 테니까 같이 있을 때 더 사랑하고 아껴줘야 한다는 거.”
반짝이는 별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영숙은 몸을 혜란에게로 돌리고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그러니까, 엄마랑 약속해. 앞으로 미워하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에이, 그게 뭐야.”
“엄마는 지금 엄청 진지하거든. 자, 빨리!”
혜란은 자기 새끼손가락을 엄마 새끼손가락에 건다.
“우리 약속한 거야. 저기 별들이 증인이고!”
영숙은 다른 손으로 하늘의 별들을 가리킨다.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별들이 유난히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