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시작 한 시간을 앞두고 △△대학교 문예창작과 실기 시험장에 도착했다. 날씨가 추워서 갈색 코트를 걸쳤다. 시험을 마치면 같이 서울 구경도 할 겸 지혁이도 함께 왔다. 자기가 함께 가면 덜 긴장될 거라 하더니, 정작 나보다 더 떨었다.
“잘하고 와라. 밖에서 기도하고 있을게.”
친구의 고마운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에 들어서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보낸 문자였다.
‘몸에 힘 빼고 편안한 마음으로. 너의 따뜻한 마음을 풀어내면 좋은 시가 나올 거야. 파이팅!’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뻐근한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합격을 위해 포장된 시를 쓰기보다는, ‘김용민’을 대변할 시를 쓰고 싶었다. 김도완 시인의 말처럼 ‘삶’이란 단어를 보고 어떤 이는 ‘사랑’이라 읽고, 다른 이는 ‘고독’이라 읽더라도 마지막엔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지도록.
감독관이 원고지를 나눠주고 실기 주제를 칠판에 적었다.
지붕.
지붕이라….
어려운 소재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머릿속에 ‘지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려봤다. 사랑하는 남녀가 지붕 위에 앉아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 시골집 지붕 아래에 집을 지은 제비와 추운 겨울날 지붕에 달린 고드름…. 생생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하지만 이런 것에는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없어서 얼른 다른 이미지를 떠올렸다. 주어진 시간은 2시간. 한참 생각하다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조금씩 써 내려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지붕같이 넓은 등으로 모진 바람을 막아주는 사람. 빗줄기 쏟아지는 날에도, 소복이 쌓인 눈들이 무거운 눈덩이로 변해도 지붕이 되어 나를 지켜주는 사람. 그 사람의 실루엣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펜을 잡고 원고를 채워갔다. 실타래 풀리듯 문장이 술술 써졌다.
#5
“저희 출판사에서 김도완 시인의 유고 시집을 발간할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다음으로 김도완 시인의 아들이신 김용민 시인의 기념사를 청해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등 뒤로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박수 소리에 떠밀리듯 단상으로 나갔다. 긴장을 많이 한 탓에 얼굴 근육이 굳어버린 것 같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다. 맨 뒷자리에 앉아 씨익 웃고 있는 지혁이도 보였다. 영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울고 있는 영하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마이크를 잡았다.
“김도완 시인은 따뜻한 아버지, 때로는 훌륭한 스승님으로서 저를 이끌어주셨습니다.”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흘렀다. 눈주름 번지게 잔잔히 웃으시던 아버지의 미소가 어른거렸다.
“기자분들과 평론가분들이 제게 유고 시집에 대한 해설을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시집만큼은 해석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인이 가슴으로 쓴 시들을 여러분도 가슴으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기자와 평론가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수첩을 덮었지만, 이해한다는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꼭 낭독하고픈 시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부족한 실력으로 쓴 작품이지만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시이자,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시를 낭독하겠다는 말에 회견장이 고요해졌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몸에 힘이 빠지며 뻐근하던 어깨가 편해졌다. 그리운 아버지를 회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붕>
김용민
시린 찬바람과 함께 무거운 눈덩이가 시골집에 내려앉았다.
털어내다 혹여 무너질세라
얇은 손가락 마디 같은 기왓장을 덧대어
낡은 지붕 홀로 묵묵히 짊어지고 있었다.
지붕 아래 따뜻한 아랫목에서 풍기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짭조름한 오이무침 냄새,
엄마의 저녁 밥상을 기다리며 재잘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무도 올려다보지 않는 외로운 곳에서
짓무른 어깨 위로 굳은살이 생기고
슬금슬금 올라오는 덩굴이 숨통을 조여와도
지붕은 가정의 평화로움을 지켜내며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낡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이기적인 관계가 어디 있을까.
지붕이 낡을수록 가정은 굳건해졌다.
간밤의 살을 에는 찬바람이 지나간 다음에야
처마에 달린 채로 꽁꽁 얼어버린
외로운 지붕의 눈물이 보인다.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빛 너머로
등을 다독여주는
그래그래, 미소 잔잔한 지붕을 올려다본다.
눈시울 뜨겁게 하는 아버지의 고달픈 삶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