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이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새벽의 소동으로 수민은 자기 방에 돌아간 후에도 한참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소동의 여파는 수아에게도 컸다. 오늘 시험을 망치면 다 고슴도치 때문이라며 내내 신경질을 부리다가 아침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가버렸다.
쏴아. 미애는 설거지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 정수와 수민도 아침을 거의 먹지 않았다. 여느 날 같으면 이 시간의 여유와 정취를 한껏 즐기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 거북을 키울 때 약속대로 수민은 아침저녁으로 사료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에 던져준 사료를 거북이 제때 먹지 않으면 미생물이 금방 번식하고 이끼가 끼어서 수조가 더러워졌다. 배설물까지 더해지면 거북의 건강을 위협할 수도 있어 일주일에 한 번은 수조의 물을 다 빼고 돌멩이까지 깨끗하게 세척해야 했다. 청소를 돕던 남편이 회사 일로 퇴근이 늦어지면서 이 일은 오롯이 미애의 몫이 되었다. 고슴도치를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곤충을 싫어하는 미애가 고슴도치가 곧잘 먹는 귀뚜라미를 키우려고 상추를 기르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먹이 주는 일은 수민이 해도, 고슴도치를 위해 귀뚜라미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고는 고스란히 미애 차지가 되었다.
설거지를 마친 미애는 수조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하는 동안 거북은 세숫대야에 옮겨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두었다. 수조에 물이 다 빠지자 돌과 돌멩이를 꺼내 사이사이에 낀 이끼를 제거했다. 수조는 뜨거운 물로 깨끗하게 닦고 헹궈냈다. 말끔해진 수조에 돌과 돌멩이를 다시 넣어 자리를 잡고 돌이 잠길 정도로 물을 채웠다. 오전에 시작한 청소는 정오가 지나서 끝났다. 미애는 일광욕을 즐기던 거북을 수조에 넣어주었다. 거북은 깨끗해진 집이 마음에 드는지 목을 쭉 빼고 한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미애는 내친김에 집 청소까지 끝냈다. 냉장고 위며 신발장까지 다 정리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침도 걸렀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수민이랑 수아는 뭐라도 좀 먹었을까?’
미애는 새벽에 일어난 후 처음으로 소파에 앉았다. 별 생각 없이 창밖을 내다보는데 햇살이 어찌나 눈부신지 저절로 눈이 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수민이었다.
“어, 수민아. 벌써 왔어?”
“응, 오늘은 특별활동 있는 날이라 일찍 마쳤어요.”
“배고프지? 얼른 가방 갖다 놓고 나와.”
“엄마, 저녁에 누나한테 사과할래요.”
“수민이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유가 뭘까?”
“오늘 친구들한테 고슴도치를 자랑했는데 싫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기분 나빴는데 창수가 자랑하는 걸 듣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응? 창수가 뭘 자랑했는데?”
“지렁이요.”
“어? 지렁이?”
“네, 창수는 아빠 따라 낚시 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지렁이를 미끼로 꽂으면 물고기가 잘 잡힌다고 지렁이가 정말 사랑스럽다고 하지 뭐예요. 으….”
수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고슴도치가 좋아도 누나는 싫어할 수 있는데 내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오! 우리 수민이 제법인데.”
미애는 수민이 대견했다. 가방을 두려고 수민이 방으로 가자 미애도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잔꽃무늬가 있는 하얀 접시에 방울토마토를 소복하게 담아 수민이 늘 앉는 식탁 자리에 두었다. 이제 곧 고슴도치를 데리고 와서 하루 일과를 말할 테니까.
“어, 고슴도치가 없어졌어요!”
고슴도치 집을 들고 주방으로 나온 수민의 얼굴이 창백했다. 미애는 수민이 내민 통을 들여다봤다. 깨진 부분을 붙여놓은 테이프가 떨어진 채 텅 비어 있었다.
“괜찮아, 집 안에 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우선 네 방부터 찾아보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수민은 자신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거나 침대 아래에 숨은 게 아닌가 싶어 이불도 조심조심 걷어내고, 손전등으로 침대 아래도 샅샅이 살폈다. 옷장의 옷들을 하나씩 옮기며 자세히 살피고, 서랍에 있는 물건도 다 꺼냈다. 자기 방 수색을 끝낸 수민은 수아의 방으로 갔다. 미애와 수민은 수아가 오기 전에 이 상황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통한 듯했다. 하지만 구석구석 다 뒤져도 고슴도치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새벽에 화장실 앞에서 발견된 게 오히려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에 애완동물 용품점에 들른 정수에게 전화가 왔을 때 미애는 고슴도치의 탈출 사실을 알렸다.
“또?”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정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저녁 준비가 끝나갈 무렵 정수가 새 집을 안고 등장했다. 사면이 투명한 아크릴로 되어 있고, 안에는 원목으로 만든 아담한 집에 물통과 사료 그릇, 쳇바퀴도 갖춰진 너무나 예쁜 집이었다. 수민은 새 집을 받아 들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루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세 사람은 어제와 사뭇 다른 분위기로 식탁에 앉았다.
“그 녀석 참, 자꾸 가출을 해서 큰일이네. 허허.”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 정수가 농담을 건네자 수민은 씩 웃으며 옆에 놔둔 새 집을 만지작거렸다.
“멋진 집이 생긴 걸 알면 금방 돌아올 거야. 기운 내. 아들.”
띠, 띠, 띠, 띠.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한다던 수아가 거실로 쑥 들어섰다.
“공부하고 온다더니 일찍 왔네. 배고프지?”
미애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친구들이랑 먹었어요. 아침에 정신없어서 참고서를 다 못 챙겨갔는데….”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수아가 갑자기 눈을 치켜떴다. 시선은 식탁 의자에 올려둔 새 집에 꽂혔다.
“이수민! 고슴도치 네 방에서만 키우라 그랬지? 아침에 일도 모자라서 이젠 내 자리에 고슴도치를 놔둬?”
고슴도치가 사라진 걸 알 리 없는 수아가 수민을 몰아붙였다. 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 집은 비어 있지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아, 이거 빈집이야. 녀석이 또 가출했거든. 허허.”
눈치 없는 정수의 말에 미애와 수민은 그만 맥이 탁 풀렸다. 미애가 정수에게 말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또?”
정수를 똑 닮은 수아가 말했다. 미애는 정수도 조금 전 수아와 똑같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을 거라 확신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놓친 선수처럼 미애와 수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수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고거 쌤통이다. 이제 영영 안 돌아오면 좋겠네.”
짧은 순간이지만 미애는 차라리 수아가 화를 냈으면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묘한 기류가 수아와 수민의 사이에 흘렀다. 잠시 후, 수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아에게 미안해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누나 미워.”
이날 이후 수아와 수민은 서로를 소 닭 보듯 대했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인 고슴도치는 어디에 숨었는지 가시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갈수록 말수가 줄었다. 하교 후 거북 앞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았지만 고슴도치에게 하듯 자기 일과를 조잘대지는 않았다. 수아는 시험이 끝나고 바로 이어진 수학여행 일정으로 수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비 내리는 아침, 미애가 베란다로 나갔다. 상추 모종에는 상추가 제법 자라 있었다. 순전히 귀뚜라미 먹이 수급을 위해 시작한 일이라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지만 미애는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왜 귀뚜라미를 기르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슴도치가 사라진 지 10일이 지났다. 처음에는 무신경하던 수아도 언제부턴가 말수가 준 수민이 걱정되는지 집에 돌아오면 고슴도치 출현 여부부터 물었다. 고슴도치 거취가 궁금한 게 아니라는 걸 미애도 알고 있었다.
어느 휴일 저녁, 미애는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봄이 다 가도록 미세먼지와 황사로 창을 열지 못하는 날이 많았는데 하루 종일 내린 비로 오랜만에 밤공기가 아주 청명했다. 고슴도치가 사라지고 얼마간은 청소할 때 소파 뒤나 침대 아래서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집 안에 없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야행성이니 해가 지고 나면 혹시나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한 번도 조사(?)하지 않은 베란다를 구석구석 살피던 미애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베란다 바깥 창문 틈에 낯설지 않은 생명체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슴도치가 분명했다.
“어, 어, 여보, 아니 수민아! 고, 고슴도치 찾았다!”
미애의 외침에 온 가족이 우르르 거실로 쏟아져 나왔다. 미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분명 고슴도치가 있었다. 소란에도 꼼짝하지 않아서 죽은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누구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데 수민이 용기 내어 까치발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꼼짝도 않던 고슴도치는 인기척을 느끼고 갑자기 등에 가시를 바짝 세웠다. 수민은 마음이 급했다. 이번에 놓치면 다시는 고슴도치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코앞까지 다가간 수민은 일전을 앞둔 장수처럼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당장이라도 가시를 발사할 것처럼 몸집을 부풀렸던 고슴도치가 창밖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아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4
미애와 수아는 베란다 난간에 붙어서 아래 상황을 주목했다. 밤인 데다 아파트 뒤뜰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지나가다가 고슴도치를 밟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정수와 수민이 고슴도치가 떨어진 근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3층. 뒤뜰에 심긴 정원수에 떨어져 충격이 훨씬 줄기는 했겠지만 그 높이에서 떨어진 고슴도치가 과연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답할 자신이 없었다. 정수는 눈물로 범벅된 수민의 손을 잡고 미애가 알려주는 지점을 찾았다. 드디어 고슴도치를 발견한 정수가 소리쳤다.
“살아 있어!”
미애와 정수, 수아와 수민은 고슴도치 집을 앞에 두고 식탁에 빙 둘러앉았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지 가시만 더 도드라져 보였다.
“하! 고놈 참. 어떻게 3층에서 떨어졌는데도 다친 데 없이 살았지? 참 신통방통하네.”
“너무 말랐어. 지금 귀뚜라미 줘도 될까?”
수민이 울먹이자 수아가 쭈뼛거리며 핀잔을 줬다.
“안 돼. 너는 고슴도치 키운다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
그러더니 방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왔다. 손에는 과즙을 농축시켜 만든 작은 큐브 모양 먹이와 애완용 소시지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뭐야?”
“과일즙으로 만든 영양식이야.”
수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수민의 손에 쥐여주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어. 고슴도치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하냐고. 한 번씩 사라지기도 하는데 보통 며칠 지나면 집 안 어딘가에서 발견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대신 사라진 동안 먹이를 못 먹었을 테니 이런 것으로 적응을 시켜서 조금씩 먹이를 늘리면 된다고 해서 몇 개 샀지.”
수아의 설명을 듣는 내내 입술을 실룩이던 수민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누나 고마워. 나라면 절대 지렁이를 사랑하지 못했을 거야. 미안해.”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렁이? 갑자기 무슨 말이야?”
미애는 웃음이 났다.
“수민이가 너무 고마워서 잘못 얘기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지렁이라니. 녀석 참. 허허허!”
지렁이에 대해 알 리 없는 정수가 한마디 하자 수아가 거들었다.
“거 봐, 이름을 안 지어주니까 자꾸 이상하게 부르잖아. 집에 돌아온 기념으로 이름 지어주는 거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