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고 얼마 후, 40년 가까이 살던 고향을 떠나 이천으로 이사했습니다.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남편도, 딸도 저의 앞날을 응원하며 함께 움직여 주었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와 준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지만 제 능력을 높게 평가해 준 회사에 대한 책임감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밤낮없이 회사 일에 몰두했고 가정을 돌아볼 여유는 점점 줄었습니다. 규례 지키는 것도 소홀해졌습니다.
여파는 중학생 딸아이에게 미쳤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아이는 친구를 새로 사귈 기회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횡단보도만 건너면 교회였던 이전 집과 달리 새 거주지는 딸아이 혼자 시온을 찾아가기에 거리가 멀고 교통편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사 온 뒤로 가족이나 시온 식구들이 아니면 대화 상대가 없던 딸로서는 몹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예배조차 온라인 예배로 바뀌면서, 내성적인 성격에도 시온에서만큼은 활짝 웃던 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더니 코로나19로 인한 규제가 풀리고 본격적인 등교가 시작된 이후 갑자기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너 달만 지나면 졸업인 중3 아이의 돌변에 저도, 담임선생님도 당황했습니다. “조금만 견뎌라, 이겨내라” 하다가 “다 겪는 사춘긴데 뭐가 그리 힘드냐”는 모진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아이의 일기장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난 단 하루도 견뎌내기가 힘든데 모두 나에게 며칠, 몇 개월을 견디라고 한다. 난 이렇게나 힘든데….’
더 이상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방법을 찾다 전문상담병원을 알아보았습니다. 왕복 3시간 거리에 있는 병원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만 예약이 가능했습니다. 한 달 약값을 포함하면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경황이 아니었습니다. ‘내 자식이 당장 아프고 힘든데 어쩌겠어?’ 하고는 눈 딱 감고 3개월을 다녔습니다.
나름대로 유명한 병원이라 처음 한두 번은 아이에게 변화가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뿐 또다시 잠 못 들고 학교에 안 가려는 아이와 실랑이하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보통 두세 달 상담하면 나아지는데 이상하다며 방법을 바꿔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 12회차 상담을 진행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하던 평소와 달리 강하게 몰아붙이는 방법을 선택했던 상담에서 아이는 오히려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냈습니다. 그간 해왔던 치료가 물거품이 된 것 같은 불안감에, 도대체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답답한 마음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병원을 나서는 순간부터 아이와 함께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음성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비 오는 거리를 달렸습니다. 결국 잘못 들어선 길에서 왠지 모를 익숙하고 따뜻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도로표지판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시가 보이고 그 길 끝에 영상에서 자주 보던 새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콘크리트 건물에 불과할 성전이, 제게는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있던 불효자식을 두 팔 벌려 반겨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시온 앞에서 펑펑 울던 그날, 알았습니다. 세상의 유능한 의사도, 효능이 좋다는 약도 치료하지 못했던 딸아이의 마음의 병은 딱 한 가지 답, 딱 하나의 선택지로만 고칠 수 있다는 것을요.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답을 구하면 어떤 식으로든 해답을 주신다는 것을, 아이가 한참을 고통스러워하고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그토록 답을 찾아 헤매면서도 기도 한 번 절실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 어머니께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동안의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기도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후 시온 식구들에게 아이의 상황을 알리고 문자로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내 아이가 힘들어하고 아파합니다. 부디 잘 견디고 어머니의 사랑으로 천국 가는 날까지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요. 학생부, 청년부 자매님들은 수시로 연락하며 딸아이를 챙겨주었습니다. 온라인 예배가 현장 예배로 바뀌고부터 아이는 시온에서 식구들과 자주 어울리며 점차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아이가 좋아진 것만 해도 감사한데 뒤에 더 큰 축복이 따랐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습니다.
“나도 정장 한 벌 사줘.”
“정장은 왜?”
“애가 아빠랑 같이 교회 다니는 게 소원이라잖아. 좋아하는 일 해주면 더 웃겠지. 애가 교회에서 저렇게 밝아졌는데 내가 가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
16년 전 진리를 접한 남편은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유월절만 간신히 지켜왔습니다. “5분만 차 한잔해요”라는 장년 구역장님의 말에 5초 만에 도망가던 남편이 예배에 같이 가겠다며 정장을 사달라고 하니 환호성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태연히 남편과 함께 정장을 구매하러 갔습니다. 정장을 입고 예배에 출석하는 횟수가 차차 늘던 남편은 전도축제에도 참여할 만큼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딸은 말할 것도 없이 열심히 시온 모임에 참여하며 즐거운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일어난 일을 나중에 안 식구들이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놀랄 정도로 달라진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방법을 잊고 방황하던 저를 용서해 주시고 끝까지 붙잡아 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남은 믿음의 생애 동안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께 먼저 답을 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