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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딸이라는 증거

2021.0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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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에 파마를 했다. 파마가 잘 풀리는 머리라고 미용사에게 말했더니 조금 과하게 곱슬곱슬하게 해줬다. 가족들에게 예쁘다는 말은 못 들어도 괜찮다는 말 정도는 듣고 싶었는데, 퇴근한 남편이 말했다.

    “아이고, 장모님 오셨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딸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엄마, 할머니랑 완전 똑같아.”

    거울을 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더 닮아가는 외모는 누가 봐도 엄마의 딸이었다.

    누구에게나 사춘기 시절이 있다. 예민해지고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시기. 그때 나는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고 오해했다.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언니, 오빠, 남동생 사이에서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더 받고 싶어서 엄마의 농사일을 열심히 도왔다.

    하지만 어린 내 눈에 언니는 장녀라서, 오빠는 장남이라서, 남동생은 막둥이라서 더 많이 사랑받는 것처럼 보였다. 내심 서운했다. 게다가 일거리만 생기면 으레 나를 찾는 엄마가 밉기까지 했다.

    “경란아, 밭에 가서 풀 매고 오자. 우리 경란이 손이 빨라서 엄마보다 잘하드라.”

    예전 같으면 엄마 칭찬에 호미를 들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엄마보다 앞서 바지런히 풀을 벴겠지만, 이제는 칭찬마저 나를 부리려는 엄마의 고단수 전략으로 느껴졌다. 중학생이 된 나는 더이상 엄마의 칭찬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과학 시간에 부모의 혈액형에 따라 나올 수 있는 자녀의 혈액형을 공부했다.

    “우리 아빠는 O형, 엄마는 A형. 어? 나는 AB형인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론상으로 나는 엄마 아빠의 자식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만 힘들게 일을 시켰나 보다 했다.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혼자 훌쩍거리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싶어 막막하고 슬펐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걸까? 대문 앞에 버려진 업둥이였을까? 엄마에게 사실을 확인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정말 고민이 많았다.

    “경란아, 고추가 빨갛게 다 익어버렸어야. 고추 따러 가자.”

    엄마가 또 일을 시켰다. 너무너무 서러웠다. 아직 어리니까 이대로 살아야겠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서 포대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오는 나는 정말 불쌍한 아이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오빠가 의아해하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혈액형이 AB형이래요.”

    오빠는 지금까지 자신의 혈액형이 O형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자신의 혈액형이 AB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물었던 것이다. 오빠가 나와 똑같은 혈액형이라니 너무 기뻤다.

    “나도 AB형인데!”

    엄마는 그게 뭐 중요하냐는 반응이었고, 저녁이 돼서야 아빠가 혈액형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전에는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든 시대였기에 자신의 혈액형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오빠가 혈액형에 대해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불행한 아이라며 계속 오해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진작 엄마에게 물어봤다면 오해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참 바보 같았다. 그날 나는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엄마, 나는 엄마 딸 아닌 줄 알았어. 커서 진짜 엄마 찾아가려고 했지.”

    “허허허. 경란아, 거울을 봐라. 니하고 내하고 이렇게 똑 닮았는데 우째서 그런 생각을 했대?”

    아차 싶었다. 굳이 혈액형을 따지지 않아도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서운하고 미운 마음에 그걸 깜빡 잊었던 것이다.

    “그럼, 왜 나만 일 시키는데?”

    “그야 니가 꾀 안 부리고 잘하니까 믿고 시켰지.”

    엄마가 나를 덜 사랑하거나 덜 예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착한 딸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의 믿음대로 착한 딸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의 짧은 사춘기는 이렇게 끝났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나는 얼굴은 물론 목소리, 걸음걸이까지 엄마를 쏙 빼닮았다. 이렇게 딸은 엄마를 닮아가나 보다.

    오래전 나는 하늘 어머니의 자녀가 됐다. 믿음의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하늘 어머니의 자녀가 아닌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실까?’ 하며 철없이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혼의 사춘기를 지난 이제는 안다. 유월절로 하나님의 살과 피를 이어받은 나는 하늘 어머니의 자녀가 확실하다. 나를 믿고 사랑하시기에 연단의 과정을 통해 온전한 하늘 자녀로 변화시키고 계실 뿐.

    자녀는 부모를 닮기 마련이다. 주는 사랑, 바다같이 넓은 마음, 배려, 희생, 인자한 미소까지…. 이제는 하늘의 천사가 보아도 “하늘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요”라는 말을 듣고 싶다. 나는 어머니의 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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