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정리하던 중 오래된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몇 번을 이사 다니면서도 차마 버릴 수 없어 늘 챙겼던 상자입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긴 시간 먼지가 쌓인 채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사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저는 유난히 엄마에 대한 애착이 강했습니다. 더구나 연년생인 남동생과는 엄마를 사이에 두고 늘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동생이 엄마 옆에서 자는 날에는 동생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동생을 굴려 멀찌감치 밀어놓고 제가 그 자리에 눕곤 했습니다.
저는 남매 중 엄마와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엄마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저와 너무도 닮은 모습에 놀랄 정도입니다. 엄마는 당신을 많이 닮은 제게 특히나 많은 애정을 쏟아주셨습니다.
봄, 여름, 가을은 부모님이 농사일로 바쁘셨기에 저는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겨울이 참 좋았습니다. 학교 들어가기 전 어느 겨울날, 엄마는 언니 오빠가 보던 교과서를 한 글자 한 글자 읽어주시며 제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밖에서 노느라 발이 꽁꽁 얼었을 때면 차가운 발을 당신의 살에 대고 녹여주셨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 저도 제 아이들에게 똑같이 해주곤 합니다.
겨울에 엄마 손에는 항상 뜨갯감이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가 제 옷을 뜰 때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쁜 꽃무늬를 넣어 떠주신 분홍색 스웨터가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뒤돌아 앉아보라고 하시고 제 등에 뜨개질 중인 스웨터를 살포시 대어보시던, 약간 간지럽기도 하고 포근하기도 했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연 상자 속에는 엄마가 사용하시던 뜨개바늘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챙겨온 엄마의 물건이 든 상자를, 처음 몇 년간은 너무 슬퍼서 차마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인생의 반을 엄마 없이 보낸 뒤 오랜만에 열어본 상자는 어릴 적 행복했던 추억을 제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내게도 엄마가 계셨는데,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오랜만에, 약간은 어색해진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