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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머니의 사랑을 ‘숭고하다’고 말하는 이유

2020.1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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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을 주제로 한 조형예술학부의 교내 미술전 기획을 돕게 됐다. 내가 할 일은 세부 주제의 전시 서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주제는 ‘숭고’였다. 서문을 쓰기 위해서는 숭고가 무엇인지 정의부터 내려야 했다. 먼저 출품 준비 작품을 둘러보았다. 고통에 찬 여성들을 표현한 작품들이 가득했다. 흔히 아는 아름다움이나 조화로움이 아닌, 강렬한 색채와 날카로운 선으로 여성들의 고통에 찬 표정이나 상황을 묘사한 작품들이었다. 숭고를 단순히 아름다움의 개념이라 생각하고 전시 서문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숭고와 미(美)는 달라요. 숭고는 고통이에요. 칸트가 정의한 숭고에 대해 공부하고 써보는 것을 추천합니다”라고 조언하셨다.

    숭고란 무엇일까. 숭고와 아름다움은 어떻게 다를까. 우리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지적 능력과 상상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에서 조화와 비례, 질서와 대칭을 통해 느껴지는 쾌감이다. 이는 긍정적이고 직접적인 감정의 쾌감을 뜻한다. 하지만 ‘숭고’는 다르다. 칸트는 숭고를 느끼려면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저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우리의 지적 능력과 상상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범위의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대상의 절대적인 크기다.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고 다른 것과 일절 비교할 수 없는 크기를 의미한다. 세 번째는 생명력이 일시적으로 정지[死]되고 그 이후 더 강력하게 분출하는 생(生)의 감정이어야 하며, 네 번째는 간접적인 경험이어야 한다.

    ‘간접적인’ 경험이란 무엇일까? 칸트는 숭고를 가리켜 “집 안에서 창문 너머로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치려 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숭고의 쾌(快)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파도라는 거대한 죽음에 휩쓸려가는 대상이 내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죽음의 경험이 눈앞까지 오지만 그것을 막아주는 집과 창문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창문 안에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자들이 숭고를 느낄 수 있다. 숭고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과 숭고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정리하면, 관찰자가 숭고를 느끼기 위해서는 대상의 속성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고, 크기가 절대적으로 커야 하며, 일시적인 죽음을 경유한 뒤 더 큰 생명을 분출해야 한다. 관찰자는 그 모든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숭고에 대해 이해하니 왜 내가 하늘 어머니의 사랑을 숭고하다고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숭고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 사랑과 희생이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며 그 크기가 절대적이다. 또한 어머니의 사랑은 죽음과 맞먹는 고통을 수반하며 고통 이후에 더 큰 생을 분출한다.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고통을 내가 직접 겪지 않는다. 자녀인 나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안전하기에, 어머니께서 우리를 관심의 전부로 여기시며 당신 자신을 잊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기에 어머니의 사랑을 숭고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따르는 자녀로서 숭고함을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숭고를 만들어내는 핵심적 원동력은 첫째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이겨내는 ‘한계의 극복’이고, 둘째는 그 과정을 통해 얻는 결과가 생명의 분출이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죽음을 경험했을 때는 뒤이어 생명을 결실해야 하는 원리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박해를 쏟아붓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법으로 금지하는 세상에서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그들 자신과 형제자매의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길을 걸었다. 사도 바울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전하다 죽음과 맞먹는 경험들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모두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한 가치를 위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수많은 생의 폭발을 이뤄낸 것이다. 그들의 초연함과 의연한 결정과 행위에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숭고를 느낀다. 아버지 어머니의 본과 성경 인물들의 삶을 보며 숭고를 충분히 느꼈다면, 이제는 나도 어머니를 따라 숭고를 만들어내는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로 인한 고통도 감내하며 많은 이들을 살리는 데에 즐거이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시 서문
    숭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이 만약 여기에 묘사된 피 흘리는 여성도, 출산하는 여성도, 총을 대신 맞는 여성도, 원수를 살리는 여성도 아니라면, 이곳에서 충분히 숭고의 쾌(快)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보는 향유자일 뿐이니까요. 숭고미는 그런 이들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뛰어들어 더 큰 생을 쟁취하는 그들을 한 발짝 멀리에서 바라보며 숭고의 쾌를 느껴보세요. 만약 당신이 작품 밖에서, 당신의 삶 속에서도 숭고의 경험을 원한다면 옳다 생각하는 가치로 초연하게 뛰어들어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삶의 기운을 느껴보세요. 그때는 이곳에서 느낀 숭고가 당신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숭고(崇高):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 외경(畏敬), 위대함 따위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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