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나무 밑동 아래에는 바싹 마른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흩어지던 꽃씨들이 잠시 나뭇잎 사이에 숨어서 차가운 몸을 녹였다가 다시 비행할 준비를 합니다.
“한별아, 다리 아프지?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꽃씨들이 떠나고 이번에는 키가 큰 남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꽃씨들을 품어주었던 나뭇잎을 모아 불을 붙입니다. 주위에 마땅한 장작이 보이지 않자 도토리나무의 나뭇가지를 몇 개 꺾어서 불 속에 던져 넣습니다. 때마침 도토리나무에게 날아온 주주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꽥 지릅니다.
“에잇, 저 나쁜 인간 같으니라고! 아저씨, 제가 혼내 줄게요!”
뾰족한 부리를 앙다문 주주가 남자의 머리를 콕콕 쪼아댈 듯 날아들자 도토리나무가 황급히 말립니다.
“나는 괜찮아, 주주야. 오늘 날이 추워서 아이가 힘들 거야. 모닥불을 피워서 아이가 따뜻할 수 있다면 내 가지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단다.”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하는 아저씨가 답답하지만 남자가 더는 가지를 꺾지 않으니 주주도 그만 참기로 합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타들어 가고, 남자와 아이는 모닥불 곁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잠시 도토리나무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이야, 참 멋진 나무로구나. 올여름 가뭄이 심했으니, 도토리도 많이 열렸겠는걸?”
“아빠, 가뭄이 심하면 열매를 맺기 힘들지 않나요?”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도토리나무는 반대란다. 다른 나무들이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할 때 더욱 힘써서 여느 때보다 많은 열매를 맺는대. 그래서 도토리나무를 ‘들판을 보고 열매를 맺는 나무’라고 한단다. 양식이 귀할 때 많은 열매를 맺는 도토리나무 덕분에 동물들이 겨울까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으니 아주 착한 나무지.”
지난봄부터 매일같이 도토리나무를 찾아왔던 주주는, 도토리나무 아저씨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극심한 가뭄 탓에 목이 마른 동물들은 먼 곳에 있는 다른 숲으로 물을 찾아 떠나기 일쑤였고, 숲속의 많은 나무가 열매 맺기를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도토리나무는 따가운 여름 햇살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오로지 열매를 맺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기나긴 가뭄 끝에 몰아닥친 태풍이 도토리를 잔뜩 매달고 있는 굵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려는 것도 힘겹게 버텨냈지요. 지난날을 곰곰이 생각하던 주주가 열매와 나뭇잎이 거의 사라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도토리나무를 보며 감탄합니다.
“와, 아저씨 정말 멋져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주기만 하는 아저씨를 답답하게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도토리나무는 주주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그저 웃기만 할 뿐입니다.
“열매도, 잎사귀도 모두 떨구고 나면 나는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단다. 친구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내게 하나님께서 큰 상을 내려주시거든. 이제 달이 뜨는구나. 지켜보렴.”
모닥불로 따뜻하게 몸을 녹인 남자와 어린아이는 남아 있는 불씨를 말끔하게 끈 뒤 자리를 떠나고, 산 너머로 달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숲은 검푸른 보자기를 둘러쓴 듯 점점 어둠으로 물들고 하늘에는 달을 따라 나온 별들이 총총 박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은하수 강을 따라 도토리나무에게로 몰려갑니다. 하나둘 모여든 별들이 마치 처음부터 도토리나무의 열매였던 것처럼 가지가지마다 맺혀 영롱하게 반짝입니다.
바람이 숲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스쳐 갈 때마다 풀잎은 파르르 몸을 떠는 소리를 냅니다. 그와 함께 귀뚜라미들의 합창이 별들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합주를 들려줍니다. 봄부터 내내 자기를 희생한 도토리나무를 칭찬하고 위로하는 듯한 잔잔한 음률로. 이토록 신비로운 광경을 바라보는 주주의 눈도 초롱초롱 빛나는, 참 아름다운 밤입니다. 그 밤에, 북쪽 호숫가의 커다란 너럭바위 밑에는 다롱이와 또롱이가 떨어뜨린 도토리 한 알이 가만히 숨죽인 채 봄을 기다립니다. 작은 도토리는 커다란 별토리나무가 되는 꿈을 꾸며 콩닥콩닥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잠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