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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희망 식당

2023.08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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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는 무료급식소 희망 식당. 30년째 도시의 부랑자나 홀몸 어르신, 일용 근로자 등을 위해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는 곳입니다. 희망 식당의 주방 정리대에는 요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솥이며 그릇, 컵, 수저, 도마, 칼 등 각종 주방 기구들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쌓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저녁 시간이 되면 주방은 갑자기 시끌벅적해집니다.

    “오늘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이 오는 거야. 게다가 어르신이 식사하다가 나를 떨어뜨려서 얼마나 아팠는지.”

    스테인리스컵이 그때의 고통이 떠오르는지 얼굴을 찡그립니다.

    “맞아. 나도 네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서 졸다가 잠이 확 깼지 뭐야.”

    접시가 정말로 잠이 확 깬 표정을 짓습니다.

    “야, 우리가 뭐 한두 번 떨어지니? 나는 수십 번도 더 떨어졌어.”

    젓가락이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떤다는 듯 으스댑니다.

    “얘들아! 이제 자야지. 내일은 일 안 할 거야? 어려서 그런지 말이 참 많구나.”

    커다란 스테인리스솥이 뚜껑을 덜컹이며 주의를 줍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던 젓가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칫, 자기도 가마솥 아줌마에 비하면 어리면서 나이 많은 체하긴.”

    젓가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가마솥에게로 향합니다. 무쇠로 만들어진 커다란 가마솥이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짓습니다.

    “다들 수고 많았어. 내가 보진 못했지만 분명 힘든 하루였을 거야. 그래도 너희들 덕에 사람들이 식사 맛있게 하고 갔잖아. 오늘도 나만 여기서 편하게 쉬었네, 미안.”

    가마솥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집니다. 이곳 희망 식당이 생긴 이래로 쭉 있었던 가마솥은 몇 달 전 뚜껑 손잡이가 떨어진 후로 아무 일도 못 하고 있습니다. 요리 도구들을 둘러보던 가마솥이 속내를 내비칩니다.

    “너희들은 일할 수 있어서 좋겠다. 가마솥으로 태어나 가마솥의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 난 너희가 정말 부러워.”

    “아줌마는 그래도 30년이나 일했잖아요. 이제 좀 쉬셔도 돼요.”

    칼이 칼집에서 고개를 내밀며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맞아요.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하셨어요. 국이며 죽이며 누룽지까지 못하는 요리가 없었잖아요.”

    옆에 있던 도마가 맞장구를 칩니다.

    “와아, 정말 30년이나 일했다고요? 대단하다. 나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줌마는 항상 그 자리에만 계신 줄 알았어요. 아줌마, 옛날이야기 좀 해주세요. 네?”

    벽에 걸린 국자가 시계추처럼 긴 목을 흔들며 조릅니다.

    “저도 항상 궁금했어요. 아줌마는 깊은 속만큼이나 할 얘기도 많을 것 같아요.”

    스테인리스솥이 나서자 다른 도구들도 가마솥의 사연을 듣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웁니다. 가마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난 어느 농가의 부엌에 있었어. 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고 처량하게 있는데 트럭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서더니 나를 뒷자리에 태우는 거야. 버려질 뻔한 나를 데려온 분이 바로 이곳 희망 식당 소장님이야.”

    “나도 어두컴컴한 지하 창고에 오랫동안 쌓여 있다가 여기 오게 됐는데.”

    스테인리스컵이 공감한다는 듯 말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같이 지하 창고에 쌓여 있었잖아. 지금은 빛도 보고 일도 하고 얼마나 좋아.”

    대접이 신나서 재잘거립니다.

    “난 공장에서 바로 이곳에 왔는데 상황이 다 다르네.”

    프라이팬이 동그란 머리를 갸우뚱합니다.

    “얘들아! 너희들 얘기는 다음에 하고 아줌마 말씀하시게 좀 조용히 해봐.”

    스테인리스솥이 또다시 뚜껑을 쾅쾅대며 주의를 줍니다. 주위가 잠잠해지자 가마솥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갑니다.

    “처음에 소장님과 일할 때는 이런 실내 식당이 아니었어.”

    “네? 실내 식당이 아니었다고요?”

    주걱이 놀라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래. 처음에는 천막 치고 도시락에 끓인 죽을 담아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지. 소장님이 고생이 많았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으니까. 다행히 소장님의 뜻을 알고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점차 늘면서 오늘의 희망 식당이 된 거야. 난 30여 년 동안 곰국이며 미역국이며 안 끓여본 국이 없어. 정말 보람이 컸지. 배고픈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한 끼 든든히 먹고 다시 힘을 얻어 갔으니까. 한번은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졌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오는 거야. 이곳 음식이 맛있고 정성이 느껴진다면서 말이야. 그러자 소장님과 다른 봉사자들이 자신이 먹을 것까지 사람들에게 내줬어.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던 거지. 그러니 사람들이 계속 희망 식당을 찾는 거야. 물론 일은 더 많아지고 힘도 더 들긴 하지만.”

    “치, 어떤 사람들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자기는 매운 거 못 먹으니 다음에는 안 맵게 해달라, 싱겁게 해달라 막 그러던데요? 그럴 거면 자기 입에 맞는 식당에 가서 돈 내고 사 먹든가.”

    냄비가 투덜거립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속상했겠구나. 하지만 그 역시 배고프고 힘든 사람이란다. 앞으로도 희망 식당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누구도 배곯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소장님의 뜻이기도 하고.”

    가마솥의 말에 뚝배기가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그런데 아줌마는 어쩌다가 뚜껑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거예요?”

    가마솥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옛날에는 진짜 튼튼했는데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어느 날 갑자기 손잡이가 떨어지더라고. 그보다 더 슬픈 게 뭔지 아니?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없어도 식당은 잘 돌아간다는 거야. 나는 오래되고, 새로 온 너희들이 이렇게 일을 잘하니 굳이 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아니에요, 아줌마. 아줌마는 지금도 멋져요. 저는 매일 힘들다고 투정만 부렸는데 이제부터 제가 더 열심히 일할게요.”

    스테인리스컵이 씩씩하게 말하자 젓가락이 고백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보람 있게 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게을러진 것 같아요. 처음 일할 때처럼 기쁘게 할게요.”

    그 말에 다 같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희들은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 이 아줌마가 보기에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늦었으니 얼른 잠자리에 들렴. 내일 또 일해야지.”

    “네.”

    가마솥의 말에 모두 저마다의 꿈을 꾸며 잠자리에 듭니다.


    며칠 후, 식당 일을 마친 요리 도구들이 한껏 들뜬 모습으로 정리대에 들어옵니다. 희망 식당이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식당으로 선정되어 내일 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 TV에 나올 거야. 방송국에서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찍을 테니 당연히 테이블 위에 있는 내가 찍히지 않겠어?”

    접시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도 나도. 주방에서 촬영하면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내 모습이 찍힐 거잖아?”

    스테인리스솥도 확신에 차 있습니다.

    “우리 모두 TV에 나왔으면 좋겠다. 정말 생각만 해도 설레는걸? 방송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냄비도 설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마솥도 내심 내일은 원장님이 자신을 꺼내주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다음 날, 방송국에서 일찌감치 촬영을 나와 이른 아침부터 시끌시끌합니다. 요리 도구들은 여느 때와 같이 봉사자들의 손에 들려 하나둘 정리대에서 나가고, 혼자 남은 가마솥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귀를 쫑긋 세웁니다. 리포터의 발랄한 목소리가 얼핏 들리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이어 소장님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가마솥은 외톨이가 된 것 같아 조금은 우울해집니다.

    ‘나도 저 속에서 함께했으면.’

    오후가 되자 요리 도구들이 하나둘 정리대로 돌아옵니다. 오자마자 가마솥에게 앞다퉈 자랑합니다.

    “와, 정말 대단했지 뭐예요.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우리를 다 찍었다니까요.”

    숟가락이 말하자 젓가락도 한마디 거듭니다.

    “맞아요, 아줌마. 우리 전부 다 찍힌 것 같아요. 크크크크. 그런데 칼이 자기도 TV에 나오려고 칼집에서 고개를 넣었다 뺐다 하는데 사람들이 볼까 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하던지. 우리가 TV에 어떻게 나올지 정말 기대돼요.”

    “리포터 언니는 말하는 것도 교양 있지만 얼마나 예쁜지 얼굴이 제 반만 하더라니까요.”

    접시의 말에 컵이 반발합니다.

    “뭐? 반만 해? 그보다 훨씬 작았지. 네 얼굴이 좀 커야 말이지.”

    “뭐야? 사람들이 얼굴 크다고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데.”

    접시가 뾰로통하자 모두가 그건 그렇다며 접시의 말에 호응합니다. 가마솥은 그런 요리 도구들이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언제 우울했냐는 듯 이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그래, 옛날 농가에 혼자 버려져 있었을 때를 생각해 봐. 지금은 사랑스러운 요리 도구들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 내가 직접 일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들이 더 힘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다음 날, 평소처럼 혼자 남은 가마솥이 일을 나간 요리 도구들을 떠올립니다. 아침에 주전자가 주둥이가 헐었다며 아파했던 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소장님이 들어옵니다. 소장님은 들고 온 행주로 가마솥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못 써서 많이 불편했는데…. 주물공장 공사가 끝났다니 내일 가서 뚜껑 손잡이를 고쳐달라고 해야겠어.”

    소장님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느낀 가마솥은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내가 오래됐다고, 고장 났다고 버려둔 것이 아니었구나. 소장님은 나를 계속 생각하고 계셨어.’

    앞으로 다시 주방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가마솥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오랜만에 가마솥이 곰국을 끓입니다. 두꺼운 무쇠솥에서 사골이 진국을 우려내고 있습니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양복 입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시장님과 수행원들입니다. TV에 희망 식당이 소개된 내용을 보고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다며 다른 일정 중 갑자기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장님은 소장님 및 다른 봉사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수고한다고 격려해 줍니다.

    식당을 둘러보던 시장님이 가마솥이 진귀해 보인다고 하자 소장님은 식당 초창기부터 함께해 온 보물이라며 가마솥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시장님은 가마솥을 사이에 두고 소장님과 사진을 찍습니다. 가마솥은 너무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배고픈 사람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요리 도구들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가마솥 안에서 뽀얀 곰국이 맛있게 우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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