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점점 추워져서 먹이를 구하기가 힘듭니다. 무엇보다 치치는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집을 떠나 독립한 지도 어느덧 반년. 처음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난생처음 만나는 세상을 구경하느라 잔뜩 신났었습니다. 치치가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고슴도치로 산다는 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예민하고 난폭하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뒤에는 ‘생긴 대로’라는 말이 공식처럼 따라붙고요.
치치는 억울했습니다. 예민하기는 해도 난폭하지는 않거든요. 등에 붙은 가시 망토가 문제라면 치치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두른 것을 어떡하겠어요. 더군다나 아무에게나 가시를 세우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요. 그저 좀 불안하거나 불편하거나 불만스러울 때 한 번씩? 물론 최근 들어 자주 세우긴 했지만요.
“에취!”
재채기를 하느라 순간적으로 뾰족해진 가시를 오스스 떨며, 치치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습니다. 몹시 배가 고팠고, 축축한 덤불은 추위를 부추겼습니다. 까무룩 잠들 것 같은 그때였습니다.
“밤톨?”
치치는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걸 알았습니다. ‘밤송이’가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치치의 작은 몸집을 감안하면 대충 맞아떨어졌습니다. 사실 치치는 다른 어느 때보다 바로 이런 순간에 가시를 세워야 했습니다. 낯선 존재가 불쑥 찾아든, 말하자면 위기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치치는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네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치치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2
거대한 몸집. 시커먼 가시 망토. 굵직한 다리. 갑옷 같은 뱃살. 정신을 차린 치치가 마주한 존재는, 믿기 어려웠지만 같은 고슴도치였습니다. 치치는 그동안 여러 동족을 만나봤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고슴도치는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정말이지…
“못생겼다.”
생각이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당황한 치치는 얼른 사과했습니다.
“죄송해요!”
“괜찮아. 종종 듣는 말이야.”
못생긴 고슴도치의 이름은 ‘동고’였습니다. 동고는 자신을 부를 때 힘주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써달라고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치치는 시험 삼아 그의 이름을 힘주어 불러봤다가 동고의 반응에 포복절도했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갰습니다.
동고의 반전은 계속됐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건 예사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초를 가꾸는 건 취미였습니다. 제 입으로 들어갈 벌레 앞에서 놀라 까무라치기도 하고요.
해가 기울어 집 밖으로 나간 동고는 돌아와서 깨끗하게 손질한 풀뿌리와 열매를 치치 앞에 내려놓곤 했습니다. 동고는 생긴 것과 다르게 조용하고, 소심하고, 착한 고슴도치였습니다.
제때 먹지 못해 연약해졌던 치치는 동고가 돌봐준 덕에 이제 직접 먹이를 구하러 다녀올 만큼 기력을 되찾았습니다. 동고에게 미안했던 치치는 밖에 나가 먹을 만한 걸 물어왔습니다. 그리고 동고 앞으로 툭 던졌습니다. 화들짝 놀란 동고가 이내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치치는 동고의 순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습니다.
“고슴도치인 게 행복해요?”
“행복?”
고슴도치로 사는 게 행복하냐고? 동고는 치치의 질문을 곱씹었습니다. 냉큼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질문 자체가 심오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문제는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너는 어떤데?”
갓 독립한 고슴도치들 중에는 ‘고슴도치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꼬마들이 있었습니다. 젖은 덤불 속에 고꾸라져 있던 그날의 치치도 그들 중 하나일 뻔했습니다. 동고는 치치와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치치에 대해 알게 된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몸집이 보여주다시피 치치는 아직 꼬마입니다. 처음 먹어보는 열매들이 많고 그것들을 손질해서 먹는 데도 서툽니다. 은신에 어설프고 가시도 재채기를 하거나 기분이 저조할 때나 한 번씩 세울까,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꼬마니까 괜찮습니다. 자라면서 배워가면 되니까요. 하지만 치치는 무엇 하나 애착을 가지고 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생활에 의욕이 없어 보였습니다.
동고의 느낌은 정확했습니다. 그즈음 치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동고에게서 되돌아온 자신의 질문 앞에 치치는 잠깐의 침묵을 깨고 대답했습니다.
“고슴도치, 그만둘까 봐요.”
켁. 사레들린 동고가 마른기침을 뱉었습니다.
“고슴도치를 그만둔다고?”
“네.”
“그게 무슨 말이야?”
#3
고슴도치로 태어난 치치는 고슴도치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토끼든 다람쥐든 아무래도 좋습니다. 고슴도치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치치가 보기에 고슴도치로 살자면 비굴해져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만난 동족들 대부분이 같은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포악하고 위협적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과 비난에 항변하지도 않고 오해를 풀기 위해 나서는 법도 없었습니다.
동고 역시 같았습니다. 동고는 분명 좋은 고슴도치입니다. 하지만 겉모습 안의 진가를 너무 몰라주는 세상 앞에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 번이라도 증명해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습니다. 그런 동고가 치치의 눈에는 한없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하긴 어디서부터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다들 포기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치치는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동고, 혹은 다른 동족들과 다르지 않다면 차라리 고슴도치의 세계와 작별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편 동고는 치치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다른 쪽으로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치치의 계획 자체가 얼토당토않다는 건 둘째 치고 이 꼬맹이는 좀 극단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모험심 강한 꼬마 고슴도치가 짧은 생애를 살면서 받아온 상처를 동고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치치의 짐작에서 틀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동고가 누구보다 많은 오해를 받고 살았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동고는 누구보다 험악한 생김새와 내성적인 성격 탓에, 고슴도치 일가족이 받는 오해를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은 오해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행복한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동고의 삶은 치열했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었습니다. 비뚤어진 시선들에 시달리기는 했어도 그 때문에 숨어 사는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활동이 편한 시기에 움직일 뿐이었지요. 남들의 괜한 오해야 고슴도치로서 꿋꿋하게 살다 보면 자연스레 풀어지리라 믿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치치는 그러고 싶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동고는 최선을 다해 치치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했습니다.
“고슴도치가 오해받고 사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치치의 표정이 딱딱해졌습니다. 동고는 살짝 긴장했습니다.
“사, 사실 그렇잖아. 네 말처럼 고슴도치를 그만둔다 쳐. 물론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토끼로든 다람쥐로든 다르게 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치치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습니다. 동고가 마른침을 삼킨 뒤 말했습니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봐. 내가 알기로는 토끼가 귀여워도 열 받으면 장난이 아니래. 겉으로만 순한 척한다고 말이 많더라. 다람쥐는 어떻고. 쪼끄만 녀석이 먹이를 엄청나게 저장한대. 걔들도 우리처럼 겨울잠을 자거든. 그때를 준비하는 것뿐인데 욕심쟁이로 소문난 거지.”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 오해받고 사는 게 별일 아니라고. 모르고서 하는 말들에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을까?”
치치는 이미 귀를 닫고 있었습니다. 동고에게 무시당한 기분이었습니다. 흥, 콧방귀를 뀐 치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치치의 가시들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바람에 동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치, 치치야! 가시는 이럴 때 쓰는 게 아니….”
“저도 알거든요!”
치치가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 됐고, 오해받는 게 별일 아니라고 했죠? 그런데 왜 숨어 살아요? 비겁해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어요. 스스로를 좀 봐요. 못생겼지, 용기도 없지, 눈치는 아예 없잖아요!”
“하?”
동고가 특별히 못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별일 없는데 굳이 밖에 나다닐 필요를 못 느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숨어 산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눈치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실과 오해가 뒤섞인 갑작스런 비난에 동고는 치치만큼이나 얼빠진 상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