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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천국의 사계절

2025.0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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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넘게 정붙이던 곳을 떠나 이사를 왔습니다. 어느새 사계절을 한 바퀴 돌아 부산에서 두 번째 겨울을 보내며 지난 1년을 돌아봤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눈에 띈 노란 털머위꽃을 보니 내가 참 예쁜 동네에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차디찬 겨울바람을 이겨내며 꿋꿋이 선 꽃들이 대견하게 느껴져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이곳에 와 1월 한파 속에 빨갛게 핀 동백꽃을 발견한 뒤로, 계절마다 피고 진 꽃들의 흔적이 제 사진첩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동네 구경을 하며 길도 익힐 겸 시작한 산책은 아이들에게도 무척이나 신나는 일이었나 봅니다. 평소 하늘에 손톱만큼 작게 보이는 비행기도 찾아내 꼭 엄마에게 알려주는, 호기심 많은 막둥이는 산책 중에도 엄마를 불러대느라 제일 바빴습니다.

    “엄마! 여기에도 꽃이 피어 있어요!”

    산책로에 조그맣게 핀 노란 개나리와 산수유. 닮은 듯 다른 꽃들이 때로는 같은 시기에 혹은 얼마간 시간차를 두고 피는 것이 왠지 기특했습니다.

    3월이 되자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 처음 보는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입구 계단 좌우를 장식한 하얀 꽃들은 벚꽃과 비슷한데 꽃잎 모양이 달랐습니다. 꽃을 올려다보며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제게 70대 중반쯤 돼 보이는 경비원 어르신이 꽃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앵도나무 아인교?”

    “아, 벚꽃 아닌가요?”

    “이건 앵도나무. 못 봤었는가베요.”

    집에 돌아와 검색해 보니 앵두나무도 벚나무도 ‘장미과’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비슷하게 생겼나 보네. 내가 언제부터 꽃에 관심 가지고 공부까지 했던가’ 하고 생각하며 혼자 슬며시 웃었습니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단지 안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꽃잎 한 장 한 장이 겹쳐 아름다운 그늘을 만드는 목련꽃도 예쁘게 피었습니다. 4~5월에 접어드니 영산홍과 에인절트럼펫이 피고, 선명한 빨간 꽃잎이 세련되고 도도하기까지 한 장미꽃과 자주괭이밥도 피었습니다.

    여름이 시작하는 6월에 들어서며 숨 막히는 더위가 찾아왔습니다. 큰 나무 그늘만 찾아다니며 이런 더위 속에도 꽃이 필까 의문을 가질 즈음, 아파트 뒤편부터 놀이터 옆까지 생각지도 못한 푸른빛 수국 정원이 생겨났습니다. 아름다운 부케가 한 다발씩 놓인 듯해 아이들과 수국꽃 사잇길을 걸을 때 “신부 입장!”이라고 외치며 사뿐사뿐 걸었지요.

    군데군데 핀 노란 백일홍, 흰 백합, 주차장 입구의 진분홍색 배롱나무, 코끝을 스치는 향기로 즐거움을 주는 만리향…. 아파트를 나와 단지 입구까지 매일매일 지나다니는 길, 바쁜 일상에 때로는 무심코 지나쳤던 시간 속에 꽃들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저희와 사계절을 함께했습니다.

    저희가 누린 호사 뒤에는 20년 넘도록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일한 경비원 어르신의 묵묵한 헌신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봄볕 아래 쪼그려 앉아 키 작은 나무 밑동의 갈라진 가지들을 끈으로 묶어 정리하고, 한여름 더위에도 사다리 위에 올라 빽빽해진 나무를 가지치기하고, 화단의 벌레를 잡고, 약 치고 거름 주는 일까지 사계절 내내 관심과 사랑으로 꽃과 나무를 정성껏 가꾸던 어르신의 모습이 기억났습니다. 아이들과 예쁜 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즐기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던 어르신이었습니다. 어르신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밤이든 낮이든 꽃과 나무들을 돌보며 주민들에게 다채로운 사계절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문득 하늘 고향에서 자녀들을 기다리실 하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하늘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 돌아올 자녀들을 맞이하시려 아버지께서도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가에 생명나무, 하늘의 신비한 꽃나무들을 준비해 놓으셨겠지요. 자녀 향한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으로 꽃을 피워 천상의 정원을 쉼 없이 가꾸고 계실 것 같습니다. 천국의 사계절을 생각하니 하늘 아버지가 더욱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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