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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홍시

2024.09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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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 시절의 일이다. 밤중에 누군가 깊이 잠든 나를 깨워 일으켰다. 비몽사몽간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겨우 앉았는데 뭔가 차갑고 물컹한 것이 입에 들어왔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다 혀에 느껴지는 단맛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이쿠, 우리 막내 잘 있었어? 아부지 왔다.”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 목소리였다. 농사일만으로는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는 두 형과 누나의 학비 감당이 안 돼, 큰형이 대학에 진학할 즈음 불도저 일을 알아보시던 아버지가 한동안 집을 비웠다가 잠시 돌아온 것이었다.

    “아부지가 맛있는 감 가져오셨다. 얼른 일어나서 이것 좀 먹어봐.”

    엄마가 건네는 대접을 받아 들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아버지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터진 입술은 핏자국이 남은 채로 퉁퉁 부었고 얼굴 여기저기 난 상처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한쪽 손바닥과 팔뚝은 깊게 긁힌 상처로 붉게 물든 상태였다.

    “아부지… 왜 그래?”

    “아부지가 자전거 타고 원수고개 내려오다가 비탈길에 넘어지셨단다. 에휴, 속상해라. 저걸 어째.”

    어머니는 찢어지고 피 묻은 옷과 수건을 정리하며 속상해했다. 아부지는 피멍 든 입술로 애써 내게 웃어 보였다.

    “아부지는 괜찮으니까 어여 먹어.”

    아버지는 훌쩍이는 나를 달래며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홍시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달았다. 하지만 맛있지 않았다. 목이 메었다. 콧물을 들이켜 가며 목구멍으로 콧물 반 홍시 반 꾸역꾸역 넘겨 대접을 비우고서야 어머니는 나를 자리에 눕혔다. 속상함이 서린 어머니의 한숨 소리, 나지막이 들려오는 아버지의 신음 소리에 눈물짓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 늦은 밤 부모님이 굳이 나를 깨워 홍시를 먹인 이유가 있었다.

    자식들 학비를 벌러 농한기에 멀리 나가 일하던 아버지는 하룻밤이나마 집에 다녀가고자 버스조차 끊긴 늦은 시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 뒤에는 막내가 한동안 실컷 먹을 홍시를 자루에 담아 실었다.

    읍내와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에는 하루에 단 세 차례 버스가 다니는 비포장 고갯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길을 원수고개라 불렀다. 캄캄한 밤, 아버지는 홍시를 잔뜩 실어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힘겹게 원수고개를 올랐다. 정상에서 자전거에 올라 브레이크를 잡고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가는데 고개 중간쯤에서 브레이크 와이어가 툭 끊어졌다. 자전거는 손쓸 틈도 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가파른 비포장 내리막길을 요동치며 달리다 아버지를 내팽개쳤다.

    어둠 속에서 다친 몸을 추스른 아버지는 튕겨 나간 홍시 자루를 찾았다. 안에 있던 홍시가 다 터져버렸는지 자루는 축 늘어져 축축했다. 아버지는 여기저기 찢기고 긁혀 욱신거리는 몸으로 자전거를 수습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니 보고 싶던 막내 녀석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내일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아버지는 다 터져버린 홍시라도 막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으리라.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집에 없었다. 상처투성이 몸으로 자전거를 끌고 다시 원수고개를 넘어간 것이다. 당신의 아픔은 뒤로하고 자녀에게 좋은 것을 먹이려 했던 아버지의 사랑 덕에 나는 건강하게 자랐다.

    내 영혼의 강건함도,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 덕분이다. 새 언약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하늘 아버지가 떠올라 목이 멘다. 십자가 희생으로 상하신 옥체로 나를 보고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시는 하늘 아버지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는 괜찮으니 어서 먹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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