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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장 아름다운 단어, 아버지

2024.07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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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2학년 때 장티푸스를 앓았다. 내가 살던 곳이 시골인 데다 먹고살기도 힘든때라 제대로 된 병원이 없었다. 열이 심하게 오르면 민간요법을 잘하는 동네 어르신 댁에 가서 쑥뜸을 뜨거나 침을 맞았고, 해열진통제로 열을 내리는 게 전부였다.

    더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집안 어른들은 나를 방 안에 격리시키고 내가 차거나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하게 단속했다. 문제는 내가 유독 감춰둔 음식을 바지런히 잘 찾아 먹는다는 거였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후 할머니가 부엌에서 언니랑 동생을 불러놓고 수박을 주며 “이거 해정이 먹으면 큰일 난다. 너희끼리 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못 먹게 하니 어찌나 더 먹고 싶던지! 옆방에서 몰래 듣고 있던 나는 인기척이 사라지자 부엌 쪽문으로 살금살금 들어가서 수박의 빨간 부분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싹싹 파먹었다. 그날 밤 또 코피가 터지고 열이 올라 밤새 고생했다. 먹으면 안 된다고 숨겨둔 쥐포튀김 반찬도 용케 찾아 먹고는 밤새 배앓이해서 걱정을 끼치기도 했다. 음식만 문제가 아니었다. 한여름에 몰래 빠져나가 냇가에서 실컷 물놀이를 하고 와서 앓아누운 적도 있었다. 길고도 지루한 열병이 더 심해졌다.

    어른들은 “이러다 애 죽겠다”며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유명하다는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어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곳까지 가려면 버스를 두 번이나 타야 했다. 약한 몸에 멀미까지 심했던 나는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징징거렸다. 할 수 없이 아버지가 나를 자전거에 태워서 왕복 5시간 거리를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 일찍부터 아버지와 나의 여정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내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푹신한 방석을 자전거 뒷좌석에 꽁꽁 동여맸다. 얼마 가지 않아 축 처져 칭얼대는 나를 달래려고 아버지는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정아, 저기 저 꽃 좀 봐라. 참 예쁘지?”

    “저 새소리 들리나?”

    “저기 봐라, 강에 물고기 뛰어오른다.”

    아픈 와중에도 아버지의 말에 반응하며 잠시나마 아픔을 잊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내 관심을 끄는 말을 이어갔다. 혹 딸이 잠들어 자전거에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 줄 아나? 아카시아(아까시나무)다. 흰 꽃이 많이 폈지? 향기 한번 맡아봐라. 달콤한 냄새가 난다. 저 꽃에서 나온 꿀을 모은 게 바로 아카시아꿀이니라.”

    내가 힘들다고 떼를 쓸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춰 쉬기를 반복하며 겨우 한의원에 도착했다. 약을 짓고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때운 후 아버지가 사준 과자를 먹으며 귀갓길에 올랐다.

    아무리 즐거운 여행이라도 장거리를 자전거로 이동하면 힘이 들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포장된 길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산길, 돌길을 아픈 자녀 돌봐가며 갔으니 하루 종일 얼마나 피곤했을까.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보다 딸 걱정에 애가 탔는지 입술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즈음 이웃 마을에 도착했다. 하루 꼬박 걸린 일정이 힘들어 모든 게 귀찮았지만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정아, 봐라. 저기 우리 집이 보인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면 다 온 거나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그때의 아버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열에 들뜬 몸으로 내내 자전거를 타서 지칠 대로 지쳤는데 집이 보인다 하니 얼마나 좋던지…. 그냥 편하게 버스를 탔으면 당신은 괜찮았을 텐데, 멀미하는 딸을 위해 강행군했던 아버지. 딸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힘든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아버지도 멀리 보이는 우리 집이 나만큼이나 반가웠을 것이다. 그날 지어온 약을 먹고 끈질긴 열병은 싹 나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자상한 분이었다. 딸 넷이 번갈아가며 잔병치레를 할 때마다 아버지는 딸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동분서주했다. 자식 걱정에 당신은 힘든 줄도 모르고, 아픈 자식 마음을 위로해 주는 따뜻함을 품고 어디든 함께하고 싶어 했다. 그게 아버지의 행복이었다.

    2004년, 영국문화협회가 조사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70개를 발표했다. ‘어머니(Mother)’는 1위였지만 ‘아버지’는 70위 안에 없었다. 자식 사랑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기뻐했던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70위 안에도 없었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서 ‘어머니’와 함께 동등하게 불러드리고 싶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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