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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아름다운 약속 上

2020.09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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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띠띠띠띠- 현관문을 열고 영숙이 들어왔다. 분명 혜란이 집에 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혜란아! 엄마 왔어.”

    영숙은 일부러 더 큰 소리로 혜란의 방문을 열고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자는 건지, 자는 척하는 건지 혜란은 아무 반응이 없다. 옷걸이에는 잘 다려진 교복이 다소곳이 걸려 있다.

    ‘오늘도….’

    병원 조리사로 일하는 영숙의 출근 시간은 늘 이른 아침이다. 식탁에는 영숙이 새벽에 차려놓은 밥상이 그대로다. 영숙은 털썩 주저앉아 혜란의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친정엄마의 전화에 애써 정신을 차린다.

    “혜란이는 좀 워뗘?”

    “아직…. 엄마, 나 무서워. 저러다 우리 혜란이 잘못될까 봐….”

    그때의 영미처럼 훌쩍 떠나지는 않을지, 영숙의 마음은 온통 불안과 절망이 뒤섞였지만 혜란에게 들릴까 애써 숨을 삼키며 흐느낀다.

    “에휴, 어린것이 을매나 충격이 컸으면…. 근디 너무 걱정 말어, 너두 잘 이겨냈잖여. 우리 혜란이도 너맹키로 잘 이겨낼겨!”

    “그날 혜란이를 보냈으면… 해인이가 살았을까?”

    “또, 또! 쓰잘데없는 소리 헌다. 니가 혜란이 살린 거여.”


    #2
    “엄마, 나 모레 시험 끝나면 일요일에 친구들이랑 콘서트장에 가도 돼? 해인이네 삼촌이 표 구해놨대!”

    요 며칠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영숙은 혜란의 말에 마음이 찜찜하다.

    “혜란아, 다음에 가면 안 될까? 오랜만에 아빠도 오시는데 그날은 같이 저녁 먹자.”

    “힝, 그 콘서트 정말 가고 싶어! 엄마 이번 한 번만, 응?”

    혜란이 온갖 애교를 부리지만 영숙도 물러서지 않는다.

    “혜란아! 출발했어?”

    “아니… 아직. 오늘 아빠 오신다고 엄마가 안 된대.”

    “야! 이거 삼촌이 얼마나 어렵게 구한 표인데…. 우리 카페에 있을 테니까 늦어도 5시까지 꼭 와!”

    “으응….”

    혜란은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아 방문을 빼꼼 열고 엄마의 동태를 살핀다. 영숙은 주방에서 저녁 준비에 여념이 없다. 혜란은 겉옷과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까치발로 현관까지 나간다.

    ‘야호!’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영호가 쑥 들어선다.

    “아… 아빠.”

    지방에서 두 달 만에 온 아빠를 보며 혜란은 멋쩍게 웃는다. 영숙이 그런 혜란을 뒤에서 흘겨보고 있다.

    “송혜란!”

    평소와 다른 근엄한 엄마의 음성에 혜란은 뾰로통한 얼굴로 방에 들어간다. 혜란은 이유도 없이 콘서트에 보내주지 않는 엄마가 미웠다. 휴대폰을 보니 그사이 해인의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다. 혜란은 몇 시간째 방에서 꼼짝도 않는다. 엄마에 대한 무언의 시위다.

    “혜란아, 저녁 먹자.”

    아빠가 다정하게 혜란을 부른다. 혜란은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온다. 모처럼 집에 와서도 영호는 두 여자의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이 편치 않다.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보내주지 그랬어.”

    풀이 죽은 혜란이 안쓰러운지 영호가 한마디 건넨다. 영숙은 아무 대꾸도 않고 열심히 갈비에서 살을 발라낸다.

    “네가 좋아하는 갈비야. 많이 먹어.”

    영숙이 혜란의 밥 위에 갈빗살을 얹어주자 혜란도 대꾸 없이 입에 넣는다. 영숙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영호가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TV를 켠다. ‘속보’라는 붉은 글씨가 깜빡이는 것으로 봐서 어딘가에 큰 사고가 난 듯하다.

    “오늘 오후 5시경 가람시 여울동의 한 상가에서 전기 합선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로 2층 △△카페가 전소되어 6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화상을 입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댕그랑.

    뉴스를 듣던 혜란이 몸을 돌려 화면을 응시하다 수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저기는….”

    혜란은 방으로 가서 해인에게 급히 전화를 건다.

    ‘해인아! 전화받아. 제발, 제발!’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다시, 또다시 걸었지만 해인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날 이후, 혜란의 일상은 엉망이 되었다. 혜란을 지켜보는 영숙의 일상도 함께 무너졌다.

    “엄마가 보내주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것을 영숙 탓으로 돌리는 혜란의 날 선 말들은 비수처럼 영숙의 가슴에 꽂혔다. 영숙을 대하는 행동은 더했다. 식판에 차려온 밥을 그대로 엎어버리기도 하고, 교과서와 교복을 내다버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섬에 유배시킨 것처럼 혜란은 자신의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영숙은 오늘 혜란의 휴학계를 학교에 제출했다. 학교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 영숙의 눈에 체육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가슴을 누르는 묵직한 통증에 영숙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집으로 돌아온 영숙은 혜란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향했다. 얼마 전 동생 영준이 엄마 집을 새로 지어드렸는데 혜란의 일로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휴학계를 내는 것으로 영숙과 타협한 혜란은 외할머니 집에서 며칠 머리 좀 식히고 오자는 말에 선심 쓰듯 응낙했다. 잊지 못할 아픔을 겪은 딸을 위해 떠나는 여행. 하지만 영숙은 알고 있다. 지금 엄마를 찾아가는 이 여정이 혜란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평생 치유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준 엄마의 사랑이 지금 이 순간, 영숙에게도 절실했다.


    #3

    산자락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꽃들의 향기와 아지랑이 따라 피어오르는 흙 내음, 새들의 노랫소리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모든 것이 완벽한 한 폭의 그림 같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유럽풍 전원주택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이번에 삼촌이 할머니께 지어드린 집이야. 예쁘지?”

    혜란은 대답이 없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먼저 내린 영숙은 혜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한다.

    “아이고, 오느라 고생했제?”

    마당 한쪽에 놓인 평상에서 콩을 고르던 순녀가 옷을 털며 일어나 딸과 손녀를 반갑게 맞는다.

    “우리 혜란이…. 잘 왔다. 잘 왔어!”

    순녀는 거북이 등딱지처럼 까칠한 손으로 혜란의 등을 토닥인다. 웃음 많고 애교 많았던 손녀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자 순녀는 마음이 아프다.

    “엄마, 집이 진짜 예쁘네.”

    “좋다마는…. 나는 영 정이 안 간당께. 집도 겁나게 크고 저 2층은 나가 무릎이 아파서 잘 올라가도 못햐. 뭣한다고 이층집을 지어가꼬.”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영숙과 달리 혜란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순녀는 주방에서 갓 찐 감자와 고구마, 잘 익은 김치 한보시기를 담아서 혜란 앞에 앉는다.

    “그만 돌아댕기고 와서 고구마 묵어.”

    2층에서 내려오는 영숙의 손에 빛바랜 교복이 들려 있다. 영숙은 누렇게 변한 셔츠와 남색 체크무늬 치마와 조끼 그리고 ‘마영숙’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재킷을 바닥에 가지런히 놓는다. 혜란은 교복을 보며 엄마도 자신과 같은 학창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거는 이상하게 안 버려지데. 니는 교복 입을 때가 제일 이뻤어라.”

    순녀가 교복을 이리저리 들추자 혜란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그럼. 내가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나도 한때는 우리 혜란이처럼 날씬하고 예뻤지.”

    “아야, 말은 똑바로 해야제. 날씬은 무신. 니는 통통허고 귀여웠어라.”

    “엄마는, 가만있어 봐. 이거 잘하면 맞겠는데?”

    영숙은 교복을 몸에 이리저리 대어보다가 안방으로 들고 들어간다.

    “야야, 아서라.”

    말은 그렇게 해도 순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혜란은 티격태격하는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다. 불현듯 사고 이후 엄마와 웃으며 대화를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 엄마는 학교 다닐 때 어땠어요?”

    순녀가 안방을 한번 쳐다보고는 속삭이듯 대답한다.

    “참 착했제. 그라고 그림도 끝내주게 그렸제! 상도 많이 타고, 저 2층에 아직 니 엄마 그림이 있쟈.”

    순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혜란에게 쥐여준다.

    “엄마가 그림을 그렸다고요?”

    혜란은 아무리 상상해도 교복을 입고 그림을 그리는 엄마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엄마가 야그 안 하디?”

    “전혀요. 할머니, 저 엄마 그림 보고 싶어요.”

    “그랴? 그럼 올라가 볼까?”

    혜란의 부축을 받으며 순녀가 2층으로 올라간다. 순녀는 다락방 구석에 있는 책상 아래에서 낡고 커다란 상자 하나를 꺼낸다.

    “여기 어디 있을 틴디. 아이고, 여깄네!”

    순녀는 상자에서 꺼낸 그림을 혜란에게 하나씩 건넨다. 정물화에서 인물화,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혜란은 엄마의 그림을 받아서 벽에 차례차례 세운다. 그림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다. 혜란은 연습용이라 적힌 스케치북을 넘기다 연필로 그려진 장난기 넘치는 남자아이를 보고 묻는다.

    “할머니, 이 아이는 누구예요?”

    순녀는 그림을 보자마자 미소를 짓는다.

    “느그 삼촌, 영준이 삼촌이제. 그때가 한 열 살쯤 됐나?”

    다음 장을 넘기니 이번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가 나온다.

    “어? 할머니 이 여자아이는 누구예요? 나 어릴 때랑 꼭 닮았네. 보조개도 그렇고. 우아, 신기하다.”

    순녀는 혜란과 그림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랴. 참 많이 닮았제? 영미…. 느그 이모다.”

    그림 속 아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순녀가 거친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어느새 순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모요?”

    혜란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를 보며 이모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예감한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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