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회사에서 야심차게 개발한 제품이 출시됐다. 영업 담당자인 나는 유럽의 바이어들에게 신제품을 소개하기 위한 출장을 계획했다. 방문지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밀라노, 스위스의 취리히 그리고 독일 남부의 투틀링겐. 이 중 가장 기대되는 곳은 처음 가보는 스위스였다.
솔직히 해외 출장은 힘든 준비 과정, 빡빡한 일정, 실적에 대한 부담,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서 겪는 불편과 외로움과 위험 등의 이유로 반갑지 않을 때가 많다. 그나마 출장 중 현지의 다양한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고 주변 명소를 틈틈이 둘러보는 것으로 위안과 보상을 삼는데, 각종 관광지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펼쳐진 유럽이라면 반갑지 않을 턱이 없었다. 당장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여정을 계획한 뒤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렌터카를 예약했다. 국경 없는 유럽에서 자동차 여행, 게다가 알프스산맥을 넘는 여행이라니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었다.
밀라노공항에 도착해 예약한 렌터카를 찾아 남쪽으로 약 3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피렌체로 향했다. 다음 날, 피렌체 일정을 마치고 밀라노로 다시 올라와 향후 일정을 점검했다.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달려 소도시 코모를 지나 바로 스위스 국경에 이른다. 루가노와 벨린초나를 거쳐 E35번 도로를 따라 알프스를 넘으면 네댓 시간 안에 충분히 취리히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알프스를 좀 더 깊숙이 감상해 보고 싶은 욕심에 중간 경유 코스로 알프스의 고트하르트 고갯길을 택했다.
다음 날 아침, 밀라노의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호텔을 나서며 마음은 벌써 알프스를 넘는 듯 설렜다. 오전에 밀라노 근교에 있는 바이어를 방문하고 바로 알프스를 향해 엑셀을 힘껏 밟았다.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수백 년 된 중세의 성과 가옥들이 늘어선 이탈리아의 풍경은 드라이브 내내 눈을 즐겁게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웅장한 알프스산맥이 그 위용을 뽐내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차는 편도 1차선 길로 접어들고 알프스가 가까워질수록 길은 서서히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휴게소와 주유소가 옆으로 스치듯 지나갔다. 자동차의 연료게이지 바늘은 어느덧 마지막 빨간색 경고선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차, 저 휴게소에 들렀어야 했는데…’ 하고 순간 생각했지만 지나친 휴게소로 돌아가기가 번거로워 다음 휴게소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여유로운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확연히 산세가 드러나고 오르막 경사가 이어지는 동안 간헐적으로 보이던 민가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아까 지나쳤던 휴게소에 들러 주유하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하지만 어느 도로든지 휴게소는 띄엄띄엄 나오기 마련인지라 빨간색 경고선에 거의 다다른 연료게이지 바늘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창밖으로 지나가는 알프스의 풍경을 눈에 담기 바빴다.
그때였다.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몰려온 안개가 순식간에 주위를 덮쳤다. 생각지 못했던 알프스의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이정표도 안 보이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인식할 수 없어 비상등을 켜고 전방을 주시하며 계속 서행으로 차를 몰았다. 차창은 온통 안개로 뒤덮여 마치 폐쇄된 하얀 상자에 갇힌 느낌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연료게이지 경고등에 불이 들어왔다. 행여 이대로 깊은 산중의 편도 1차선에서 차가 멈춰버린다면 그보다 더 최악은 없을 것이었다.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10킬로미터? 5킬로미터? 식은땀이 흘렀다.
짙은 안개 속 갓길은 너무 위험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해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의 지도로 휴게소 위치를 확인하고 안개가 걷힌 후 움직여야 했다. 휴게소가 아니면 작은 마을이라도 나타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1~2킬로미터쯤 더 움직일 즈음 희미하게 길이 보였다.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좁은 길로 무작정 차를 몰았다. 설령 숲이 나온다 해도 거기에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다행히 길은 광대한 알프스 산중의 어느 작은 마을로 나를 안내했다. 무성한 나무숲 사잇길을 따라 죽 들어가자 차츰 밀려가는 안개 너머로 서너 채의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화 속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문을 열고 나올 듯한 곳이었다.
첫 번째 집 마당에 조심스럽게 차를 세웠다. 아직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안개가 물러가며 집과 주변 숲의 윤곽이 차츰 드러났다. 산골 마을에 불현듯 나타난 낯선 동양인에 마을 사람들이 너무 놀라지 않기를 그리고 친절을 베풀기를 바라며 그 집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백발의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흠칫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헬로.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Hello. Do you speak English)?”
할머니가 대답했다.
“@#@#%$^^%$%@#$”
“…….”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걸 이내 감지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2층에서 젖먹이를 안은 젊은 여인이 내려왔다. 역시 나를 보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말이 거의 통하지 않았지만 아기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듯 바로 행동을 취했다. 아기 엄마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자 십 분쯤 지나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밖에서 돌아왔다. 남편이었다. 다행히 그는 어느 정도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마을에서 경유를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상황을 이해한 남자는 경계심을 풀고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오케이, 팔로 미(Ok, follow me).”
그는 앞서 걸으며 차를 가지고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커다란 창고였다. 농기구와 트랙터 등을 보관하는 곳인 듯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창고 한쪽에 있는 철문 옆으로 차를 세웠다. 그가 철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곳에 주유소의 주유기와 유사한 급유기가 있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탄성을 내뱉는 나를 보며 그는 주유건을 집어 들고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 프라블럼(No problem).”
남자는 10여 킬로미터쯤 가면 휴게소가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경유 10리터를 부탁하고 넉넉히 사례했다.
남자와 가족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차에 올랐다.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비는 거의 그쳤다. 마을을 떠나 다시 도로 위로 올랐다. 오래지 않아 휴게소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눈물이 날 것처럼 반가웠다. 휴게소에 도착해 바로 주유기 옆으로 차를 대고 연료탱크에 경유를 가득 채웠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장 1~13절)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교훈은 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마중 나갈 수 있도록 기름을 예비했던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기름이 떨어져 가는 줄도 모르고 졸며 자다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고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
그날의 나는 미련한 다섯 처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해발 2천여 미터 높이의 알프스 고갯길을 넘어가겠다면서 가장 중요한 기름을 미리 점검하고 예비하지 않았던 나, 변덕스러운 알프스의 날씨에 대비해 일기예보에 주의하기보다 드라이브 코스 검색에 빠졌던 나, 고갯길이 임박했을 때 이미 기름이 다 떨어져 있었음에도 ‘다음 휴게소에서 넣지, 뭐’ 하면서 안일하게 경치 구경에 빠졌던 나는 등불이 꺼져 가는 줄도 모르다가 뒤늦게 허둥지둥 기름을 찾던 미련한 다섯 처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기름이 다 떨어진 줄도 모르고 알프스를 넘으려는 미련한 드라이버의 모습 그대로는 아닐는지. 나의 알프스 여행기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성경의 예언대로 캄캄한 흑암의 날이 홀연히 이르게 될 때에 기름이 다 떨어져 있으면 어찌 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마이페이지 앱을 열어 나의 믿음 게이지를 살펴본다. 설교 청취 100퍼센트, 책자 읽기 80퍼센트, 성경 읽기 50퍼센트다. 요즘 성경 읽기에 너무 소홀했다. 하늘 아버지를 뵙고 싶으면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 하신 하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진리책자도 자주 읽고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도 더 가져야겠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등불을 환히 밝히고 맞으러 나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