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니 남편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할까 둘러보다가 지난주에 배달 온 택배 상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소비자가 직접 정수기를 관리하도록 보내주는 정수기 필터였습니다.
남편이 손재주가 없어서 무언가 조립하는 일은 거의 제가 하는 터라 식사 준비가 될 때까지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10분이면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설명서대로 전원 코드를 꽂아둔 채 정수기 뚜껑과 필터 뚜껑을 열어 필터를 교체했습니다. 얼추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해졌습니다.
택배 박스 안에는 ‘유로키트’라고 적힌 봉투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뜯어보니 정수기 물이 지나다니는 호스들을 연결하는 허브 같았습니다. 유로를 교체하기 위해 나사 4개를 풀고 속 뚜껑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설명서를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설명서와 정수기를 대조하며 한참을 씨름하는데 남편이 밥부터 먼저 먹으라며 불렀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물을 달라고 해 급한 마음에 정수기 뚜껑만 닫고 급수 버튼을 눌렀습니다. 물이 잘 나오는가 싶더니 정수기 바닥으로 물이 흐르고 급기야 공중으로 물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정수기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허둥지둥 흐르는 물을 닦다가 정수기 호스에서 밸브를 발견하고 얼른 잠가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주방이 이미 물바다로 변한 뒤였습니다.
휴일이라 A/S도 부를 수 없고 당장 마실 물도 없으니 참 난감했습니다. 그때 남편과 큰아들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며 정수기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열심히 설명서를 살피던 큰아들이 “엄마, 나사를 1개만 풀어야 하는데 왜 4개나 풀었어?”라고 물었습니다. 설명서를 대충 읽은 제가 나사 4개를 다 풀고 속 뚜껑까지 열어버리는 바람에 설명서 그림과 달라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물이 새는 원인도 큰아들이 찾아냈습니다. 이번에 공대에 합격한 큰아들 덕을 톡톡히 봤지요.
유로를 무사히 교체하고 바닥에 흐른 물도 다 닦아낸 뒤 정수기 버튼을 눌렀는데 이번에는 화면에 누수 에러가 뜨면서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인터넷을 뒤지던 남편이 “여보, 여기에 우리랑 똑같이 정수기가 누수돼서 고친 사람이 있어”라고 소리쳤습니다. 남편이 찾아낸 사례를 보고 정수기를 무사히 고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물을 마실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오며 문득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각자의 역할이 있고 연합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하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남편이 아니라 여자인 제가 가구 수리, 기계 조립을 하는 것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아들의 활약과 남편의 도움 덕분에 정수기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연합이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시온에서도 연합이 참 중요한데 한 식구 한 식구를 같은 지체로 소중하게 여기며 섬겨주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늘 어머니 닮은 마음으로 식구들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고 섬기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어머니 입가에 미소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