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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마분지에 그려진 엄마의 선물

2023.0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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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생 시절, 아빠의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형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엄마 아빠는 사 남매를 먹이고 입히느라 밤낮으로 바쁘셨지요. 친구들이 웅변, 음악, 미술, 태권도 학원을 다닐 때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빤한 형편을 생각하면 차마 엄마에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쑥쑥 자라던 저희는 해마다 엄마가 어디서 구해온 옷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새 옷인 줄 알고 입었고, 아무리 어려워도 교육만큼은 소홀히 할 수 없다며 겨우겨우 구해온 다 낡은 동화책이나 위인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저희 집에는 없는 소파나 피아노, 전화기, 팔다리 관절이 움직이는 플라스틱 인형, 책장에 가득 들어찬 전집을 보면서 마치 동화 속의 집에 온 것 같아 부러웠지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바로 달려와서 여덟 살 동생과 함께 둘이서 반바지의 실밥을 따고 치약 칫솔을 봉지에 넣는 엄마의 부업을 도왔고, 기저귀를 찬 어린 두 동생의 육아를 돕는 일은 큰딸인 제 몫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도 어떻게든 교육을 시켜주던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저를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 주었습니다. 학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임을 어린 저도 알았지만 피아노를 너무 배우고 싶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다녔습니다. 집에 와서는 바둑알을 다섯 개씩 놓고 매일 다섯 번 복습했는데, 엄마 앞에서 방바닥에 피아노 책을 펼쳐놓고 입으로 계이름 소리를 내며 그날 배운 것을 보여드리면 엄마는 몇 번이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친구들과 열심히 학원에 다니며 실력이 어느 정도 늘었을 때, 학원 선생님이 해마다 열리는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이미 두어 번의 대회를 나가지 못했던 저를 위해 엄마는 어렵사리 참가비를 마련하고, 예쁜 드레스랑 신발을 갖춘 친구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도록 시장에 가서 하늘하늘 예쁜 하늘색 원피스와 새 구두, 머리 방울까지 사주었습니다.

    대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친구들은 연습에 매진했습니다. 집에서도 연습하는 친구들과 달리 집에 피아노가 없는 저는 학원에서 기다렸다가 빈자리가 나면 연습하거나 친구 집에서 실전 연습을 몇 차례 한 게 전부였습니다. 집에 오면 방바닥을 건반 삼아 입으로 소리 내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엄마가 저를 부르시더니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몇 장을 이어 붙인 마분지였습니다. 접어놓은 마분지를 한 장씩 들추자 놀랍게도 피아노 건반이 펼쳐졌습니다. 저를 위해 엄마가 마분지를 사서 실제 피아노 건반 사이즈와 똑같은 치수로 자를 대고 그리고, 검은 건반들을 하나씩 매직펜으로 칠해 조금이나마 진짜처럼 연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88개 건반 중에 당장 연습에 필요한 60여 개를 먼저 그렸다면서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는 꼭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분지일지라도 피아노가 생겨서 그저 기뻤고, 어디서든 펼치고 접을 수 있고 소리가 안 나서 밤에도 연습이 가능한 저만의 피아노를 선물해 준 엄마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마분지 피아노 위에서 밤이고 낮이고 날마다 연습하는 저를 보며 흐뭇해하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며 마분지 위에 건반 하나하나를 그리고 칠할 때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제가 원하면 끝까지 음악도로 밀어주겠다며 초등학생이던 저에게 끊임없이 힘과 용기를 준 엄마에게 어떤 말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음악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제 마음은 늘 마분지 피아노에 그려진 엄마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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