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무거운 목소리에 마음이 저렸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뵐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도 찾아뵙지 못한 죄스러움이 밀려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먼 타지에 사는 이모, 삼촌 그리고 사촌 동생들까지 전날 저녁부터 다 모여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첫째 딸이 저희 엄마입니다. 금쪽같은 첫째 딸이 낳은 딸들이라서였을까요. 할아버지는 손주인 언니와 저를 유독 예뻐하셨습니다. 특히나 언니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지요. 언니가 아기였을 때, 안아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당신의 손등을 꼬집고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일화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언니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병실로 들어가면서 이모는 할아버지가 저희를 알아보지 못해도 서운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병실 침대에 앉아계신 할아버지 눈에는 초점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지만 마치 저희를 낯선 사람 대하듯 별다른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고 눈도 마주쳤지만 “…누구?” 하는 기운 없는 목소리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씩씩한 목소리로 “아이고, 우리 할아버지! 손녀들이 마흔이 넘어서 못 알아보시나 보네” 하며 계속 알려드렸지만 전혀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귀도 잘 안 들리셔서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누구냐고 물어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있을 수 없다 싶어 가방에 있던 수첩을 꺼내 부모님의 이름을 크게 적고 밑에는 손녀인 저희의 이름을 적어 할아버지 눈앞에 보여드리며 다시 설명해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가만히 계시던 할아버지가 천천히 부모님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짚으시고 손녀들의 이름도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나가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수첩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언니 얼굴을 보시더니, “…현이가?” 하고 언니의 이름을 부르시더군요.
깜짝 놀란 언니가 얼른 할아버지 손을 잡고 “네, 저예요. 할아버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계신 곳조차 어디인지 모르시면서도 눈앞에 있는 언니는 알아보시며 이름도 부르시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둘째 딸인 이모와 둘째 손녀인 저는 끝내 못 알아보셔서 잠시 서운하기도 했지만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다 귀하고 소중하겠지만 첫째의 의미는 더욱 특별한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부모가 되게 해준 존재, 가장 먼저 사랑했고, 가장 오랫동안 사랑하는 존재. 이 모든 것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첫째들만의 특권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도 첫째들을 향한 사랑을 많이 보여주셨지요. 당신의 자녀들을 ‘장자, 후사, 유업을 이을 자’라 말씀하시며 하늘 장자들을 향한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 장자의 축복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느껴집니다. 하늘 아버지, 어머니! 측량할 수 없는 큰 사랑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믿음직한 영적 장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