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음식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몸이 허약해서 성장기에는 봄가을로 꼬박 보약을 먹었으니 먹는 문제로 어지간히 부모님 속을 썩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엄마는 내가 한 숟갈이라도 더 먹길 바라며 초등생 입맛 저격 도시락을 싸주었다. 햄이나 돈가스, 메추리알 장조림, 진미채 무침 등이 주요 반찬이었다. 그런데도 밥을 자주 남겼다. 친구들은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느냐며 내가 남긴 반찬들을 잽싸게 먹어치웠다.
학교 앞에 작은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방과 후 학원에 가면 문 앞에 가방과 도시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앞마당에서 내 순서가 올 때까지 아이들과 놀았다.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마당에 금 긋고 하는 놀이에 푹 빠져서 금을 밟았네, 안 밟았네 하다 보면 금방 피아노 칠 차례가 돌아왔다.
학원을 마치면 책가방과 도시락을 챙겨서 나처럼 빼빼 마른 친구와 덜레덜레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둘이 헤어질 지점쯤에 다 왔을 때 친구네 엄마와 마주쳤다.
“도시락 좀 보자.”
버스 정류장 평상에 앉아 있던 친구 엄마가 친구를 보더니 말했다. 친구는 우물쭈물하다 도시락을 건넸다.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어휴, 또 남겼어? 도대체 뭘 싸줘야 다 먹을래?”
친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고, 화살은 내게로 향했다.
“너는 다 먹었니?”
“네? 아, 네….”
나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대답인데 아주머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잘했네. 도시락 좀 줘볼래? 우리 애 한번 보여줄게.”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그날도 밥을 남겼으니까. 도시락은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밥을 남긴 죄에 거짓말한 죄까지 더해졌으니 누가 봐도 가중처벌 받을 판이었다.
‘도망칠까?’
도주죄까지 추가할 수는 없었다. 얌전히 판결을 기다리는 수밖에. 그런데 도시락 뚜껑이 열리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좀 봐라. 얘는 나물 반찬을 싸줘도 밥을 다 먹었네. 심지어 밥 한 톨 안 남겼잖니.”
아줌마의 말에 처음에는 두 귀를 의심했고 나중에는 두 눈을 의심했다. 도시락 안은 누군가 나물을 비벼 싹싹 긁어먹은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몫이 아닌 칭찬을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시락 가방을 뒤집어 바닥을 확인했다. ‘☆☆☆.’ 언니 친구의 이름이었다. 학원에 내 것과 똑같은 도시락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입 짧은 아이를 둔 부모의 고민은 여간 깊은 게 아닌가 보다. 친구네 엄마도 오죽 답답했으면 남의 집 아이 도시락까지 열었을까. 내가 무엇이든 맛있게 먹었다면 나를 키우며 부모님이 해온 근심의 절반은 덜어졌을 텐데. 밥을 잘 먹는 것이 큰 효도임을 그때는 몰랐다.
이제는 무엇이든 곧잘 먹는 내가 고기반찬을 집으려고 할 때였다. 아빠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반찬 접시를 끌어당기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살날이 많으니까 맛있는 거 먹을 날도 많잖아.”
뭐든 안 먹겠다고 하던 예전의 나를 상대로는 할 수 없는 농담이었다. 행복하게 웃는 아빠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부모님이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고. 부모님과 마주하며 식사하는 날이 오래오래 계속되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