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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과일청을 만들며

2021.07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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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어머니는 매년 과수원에서 직접 재배하는 농산물로 다양한 먹거리를 만들어주셨다. 덕분에 향긋한 과일청부터 감말랭이, 곶감, 쑥떡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에는 사시사철 간식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 건강이 나빠져서 그동안 해오던 일을 올해부터 모두 그만두셨다. 나는 재료만 주시면 직접 만들어 먹겠다고 아버님께 호기롭게 말씀드렸다.

    시작은 좋았다. 초여름에는 살구와 자두를 갈아서 주스로 원 없이 먹고, 일부는 설탕에 재어두었다가 시원한 탄산수에 타서 여름 내내 음료로 마셨다. 그런데 겨울을 앞두고 수확한 과일들은 손질이 만만치 않았다. 하루는 아버님이 엄청난 양의 야생 모과를 가져오셨다.

    ‘썰어서 설탕에 재어놓기만 하면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이 모과가 보통 단단한 게 아니었다. 특히 씨가 있는 중심부는 나무토막처럼 단단해서 손질하려니 어깨와 손목에 엄청난 힘이 들어갔다. 아침 일찍 시작한 모과와의 전쟁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아니, 다음 날까지 끝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칼질에 손에 힘이 빠지며 순간적으로 칼을 놓치는 바람에 두 번이나 손을 베였다. 아직도 많이 남은 모과들을 보며 포기할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모과를 따서 지게에 지고 힘들게 산을 내려오셨을 아버님을 생각하니 여기서 그만둘 수 없었다. 반창고를 붙이고 목장갑을 꼈다. 더 이상 모과의 중심부는 가르지 않았다. 과육만 베어서 큼직하게 썰어 설탕에 재며 생각했다.

    ‘도대체 어머니는 해마다 그 많은 모과를 어떻게 썰었을까?’

    며칠 뒤에는 시댁에서 생강을 보내주셨다. 생강은 모과처럼 단단하지 않으니 수월하게 청을 담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인터넷으로 생강 껍질 벗기는 법을 검색했다. 생강을 물에 불렸다가 양파 망에 넣어 문지르면 껍질이 쉽게 벗겨진다기에 그대로 했다. 과연 엄청난 양의 껍질이 물에 둥둥 떴다. 문제는 아무리 씻어도 껍질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 나온다는 거였다. 결국 숟가락으로 일일이 껍질을 벗겼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개운치 않아서 칼로 하나하나 껍질을 긁어냈다. 생강과 씨름하느라 또 밤을 새웠다. 이번에는 손가락 관절이 아팠다.

    마지막은 유자였다. 향이 좋은 유자는 모과처럼 단단하지도 않고, 생강처럼 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너무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유자가 그렇게 많은 씨를 품고 있는지 몰랐다. 작은 유자 속에 스무 개 가까운 씨가 단단히 박혀 있어서 칼질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씨를 일일이 발라내는 것도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

    “휴! 그럼 그렇지.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지.”

    유자를 썰다가 인생까지 논할 줄이야…. 나중에는 ‘팔 것도 아니고 내가 먹을 건데’ 싶어 씨째 청을 담가버렸다. 해마다 씨 하나 없이 얇게 저민 유자청을 큰 통에 한가득 만들어주시던 어머니의 수고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머니는 울금과 노니 등도 환으로 만들어주셨는데, 직접 제분소까지 가서 환을 만드는 내내 지키고 서계셨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노니 10킬로그램을 환으로 지어 보내겠다고 하시기에 지난번 보내준 것도 아직 남았다고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언제 해준 건데 그게 아직 있니. 그거 안 먹으면 괘씸죄다. 공이 아깝다는 말이야”라며 아쉬워하셨다.

    이번만큼 어머니 말씀이 가슴에 와닿은 적이 없었다. 내가 직접 겪어보니 그동안 어머니의 수고가 아깝다기 보다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제라도 어머니께서 주신 것은 무엇이든 부지런히 챙겨 먹어야겠다. 어머니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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