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겨울에 접어들면서 겸손산에는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골짜기마다 적막감이 돕니다. 그사이 키를 꽤 높게 키운 눈이는 이 정도면 강풍이 형이 와도 끄떡없겠다고 생각합니다.
맞은편 사랑산 나무들의 가지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곧 강풍이 형이 올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랑산에서부터 불어오던 바람이 점점 강해집니다. 이번에는 한파 형이랑 같이 온다더니 전보다 바람이 차고 날카롭습니다. 눈이도 바람을 맞았지만 생각보다 안 세서 마음이 놓입니다.
“뭐야! 별거 아니잖아?”
우쭐해진 눈이가 온몸으로 바람을 느낍니다. 그때 저 멀리서 강풍이 형이 몰아쳐 옵니다. 겸손산의 나무들은 뿌리를 이용해 땅을 꽉 붙잡고 버팁니다. 강풍이 형이 한파 형과 함께 겸손산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다니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눈이의 가지가 부러질 듯 휘청입니다. 눈이의 머릿속에 지난번, 강풍이 형이 지나가면서 나무 아저씨가 통째로 뽑혀 날아간 장면이 떠오릅니다. 정신이 번쩍 든 눈이가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 소리를 지릅니다.
“으악, 살려주세요!”
거센 바람 사이로 엄마 나무가 눈이에게 외칩니다.
“눈아, 엄마랑 향이 뿌리를 꽉 잡아!”
눈이는 자신의 몇 안 되는 뿌리로 향이와 엄마의 뿌리를 꼭 잡습니다. 향이와 엄마도 눈이 근처에 내린 뿌리로 눈이를 꽉 붙잡아줍니다.
“엄마, 너무 무서워요.”
“눈아, 혹시 가지가 부러지려 하면 마음을 비우고 몸에 힘을 빼렴. 그렇지 않으면 뿌리까지 다칠 수 있어. 알겠지?”
엄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풍이 형이 눈이 쪽으로 몰아칩니다. 그러자 눈이의 가지들이 바람에 어지럽게 휘청입니다.
“어떡해요, 으앙!”
잔뜩 겁을 먹은 눈이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향이가 눈이를 달랩니다.
“눈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엄마랑 내가 너를 꽉 붙잡아 줄게.”
눈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까 엄마가 말했던 대로 마음을 비우고 몸에 힘을 빼봅니다. 그리고 심하게 요동치는 자신의 가지를 바라보다가 눈을 꼭 감습니다.
#5
늦겨울을 지나 추위도 점점 사그라질 때쯤, 산들이가 겸손산을 찾았습니다. 눈이와 향이가 반갑게 산들이를 맞이합니다.
“산들아! 오랜만이다! 저번에 강풍이 형이랑 한파 형 지나간 뒤로 통 안 보이더니.”
“응. 날이 풀리니까 가볼 데가 많아서.”
향이와 인사를 나누던 산들이가 눈이를 바라봅니다.
“눈이 형, 강풍이 형 때문에 큰일 날 뻔했다면서.”
“응. 그랬는데 엄마랑 향이 덕분에 살았어. 가지가 부러지긴 했어도 원래 내 몸으로 돌아와서 차라리 잘 됐지 뭐. 그런데 사실 네가 다른 나무들한테 강풍이 형이 오는 거 전해달라고 했을 때 이야기하지 않았거든? 나 때문에 다친 나무들이 있으면 어떡하지?”
시무룩해진 눈이를 본 향이가 싱긋 웃으며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겸손산 나무들은 다 알고 있었어. 엄마는 겸손산에 오래 살아서 강풍이 형이 오는 시기를 잘 알잖아. 그래서 나한테 나무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어.”
뜻밖의 이야기에 눈이가 놀랍니다.
“그럼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럼 네가 자꾸 내 쪽으로 뿌리를 내린 것도….”
“맞아. 엄마가 나한테 눈이 네 뿌리가 약해서 바람에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같이 네 쪽으로 뿌리를 내리자고 하신 거였어.”
눈이는 그제야 높아지려는 자신을 말리던 향이와,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며 묵묵히 기다려주신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눈이를 위해 뿌리를 내리던 향이에게 화를 내고 엄마 말씀을 듣지 않던 자신의 모습도요. 눈이는 지난날의 행동들이 너무 후회스러웠습니다.
“향아, 미안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한테 짜증만 냈어.”
진심 어린 사과에 향이가 잎을 내젓습니다.
“괜찮아. 네 마음 다 이해해.”
“나 이제 엄마랑 너처럼 낮고 넓게 자랄 거야. 이왕이면 저기 저 바위 절벽까지 가지를 뻗을 거야! 그러니까 향이 네가 도와줘. 알았지?”
“당연하지!”
향이와 눈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습니다.
엄마 나무가 흐뭇하게 둘을 지켜보다가 산들이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는 눈이랑 향이가 사이좋게 지낼 때가 제일 행복해. 산들이 너도 형제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그게 부모님에게는 최고의 효도니까.”
엄마 나무의 말을 들은 산들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랑입니다.
#6
봄이 찾아온 겸손산에 꽃 내음이 가득합니다. 어느새 바위 절벽까지 가지를 뻗은 눈이가 절벽 아래로 보이는 풍경에 깜짝 놀랍니다. 한없이 커보이던 사람들도, 바람을 타고 눈이를 찾아와 키가 작다고 놀려대던 잎들의 나무도 다 조그마하게 보일 뿐입니다.
“나 벌써 바위 절벽까지 가지가 자란 거야? 우아! 여기 진짜 높다!”
밑에 있던 바위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눈이에게 말합니다.
“하하, 눈아 몰랐니? 여기는 겸손산 정상이란다. 넌 어릴 때부터 쭉 여기서 자라왔어.”
“정말요? 제가 이렇게 높은 곳에 살고 있었다고요?”
“당연하지. 아저씨는 눈이가 자라날 때부터 봐왔잖니.”
“저는 오랫동안 저기 아래 있는 나무들을 부러워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요.”
“그걸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구나, 껄껄.”
순간 눈이는, 단풍이 때문에 속상해하던 자신에게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너는 나중에 그보다 훨씬 큰 나무가 될 거란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말이 이제는 이해됩니다. 행복에 가득 찬 눈이가 다시 다짐합니다. 이 산에서 가장 큰, 아니 가장 낮고 넓은 나무가 되겠다고요. 높은 것만 큰 게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