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상 올라오는 길에 단풍이 얼마나 예쁘던지, 역시 풍경 하면 가을인 것 같아요, 호호.”
“맞아요, 저도 가을이 좋아요. 단풍 덕분에 온 산이 알록달록하잖아요.”
겸손산 정상은 등산하러 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합니다. 그 소리에 잠을 자고 있던 어린 눈향나무 향이가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봅니다. 눈이는 한참 전에 일어났는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네요. 그런데 어쩐지 눈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향아, 너도 들었어? 모두 단풍이 칭찬뿐이야. 나는 저런 칭찬 들어본 적 없는데….”
눈이의 말에 향이는 그저 기분 좋게 미소를 머금고 줄기가 옆으로 더 퍼져나갈 수 있도록 스트레칭을 합니다. 눈이는 한숨을 푹푹 쉬며 여전히 투덜거립니다.
“그러면 뭐하냐? 키가 크는 것도 아닌데.”
향이는 여전히 웃기만 할 뿐입니다. 눈이는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또 한숨을 내쉽니다. 엄마 나무가 눈이를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습니다.
“눈아, 무슨 일 있니?”
눈이가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합니다. 단풍이가 눈이 보고 키도 작고 색깔도 잡초처럼 시시하다면서 놀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뾰로통한 상태로 있는데 등산 온 사람들이 단풍이를 칭찬하는 바람에 더 속이 상한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엄마 나무가 눈이를 위로합니다.
“너는 나중에 그보다 훨씬 큰 나무가 될 거란다.”
“그래봤자 다른 나무들보다 작잖아요.”
“높은 것만 큰 게 아니야. 넓게 자라는 것도 커지는 거란다.”
눈이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닥으로만 기어서 자라는 몸이 어떻게 큰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건지 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단풍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고민하던 눈이는 키를 키워 단풍이보다 높고 큰 나무가 되기로 합니다. 그럼 단풍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요.
“일단 가지를 세워야겠지?”
향이가 눈이의 혼잣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눈아, 그건 절대 안 돼! 우리는 가지가 가늘고 약해서 위로 자라면 바람이 세게 불 때 부러질 수 있어. 그래서 엄마가 낮고 넓게 자라라고 하신 거잖아.”
향이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눈이 귀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 정도면 높게 자라도 가지에 영향이 없을 거야.’
눈이는 엄마와 향이에게 비밀로 하고 혼자서 조용히 키를 키우기로 마음먹습니다.
#2
향이는 꾸준히 뿌리를 내려 얻은 영양분으로 가지를 넓게 뻗어 나갑니다. 옆에 있던 바위 아저씨가 향이를 칭찬합니다.
“향이가 무럭무럭 자라주니 옆에서 보는 나도 기분이 좋구나. 엄마가 기뻐하시겠어.”
“정말요? 엄마 말씀대로 했더니 그런가 봐요!”
바위 아저씨와 향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눈이는 바위 아저씨가 자신은 칭찬해주지 않는 것이 섭섭합니다.
‘나도 가지를 열심히 뻗었는데…. 왜 나는 칭찬을 안 해주지? 지금 내가 향이보다 훨씬 키가 큰데!’
눈이가 혼자 속상해하고 있는데 옅은 바람이 불어옵니다. 산들이입니다.
“오, 눈이 형, 엄청 멋있어졌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키가 커진 자신을 알아봐준 산들이 덕분에 눈이는 우쭐해져서 잎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말이지….”
산들이의 자초지종을 들은 눈이가 깜짝 놀랍니다. 가끔씩 먼 여행을 떠나는 강풍이 형이 이번에는 친구 한파 형이랑 같이 가는데, 문제는 가는 길에 겸손산을 지난다는 것입니다. 저번에 강풍이 형 때문에 어떤 나무 아저씨가 뿌리째 뽑혀 날아가서 겸손산이 한바탕 뒤집어진 적이 있던 터라 눈이의 잎이 절로 떨립니다.
“형, 나 이제 사랑산에도 알려주러 가야 해. 형이 다른 나무들한테도 전해줄래? 강풍이 형 오기 전에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있으라고.”
“어? 알겠어. 내가 전해줄게.”
산들이가 떠나고 눈이는 깊은 고민에 잠깁니다. 곧 강풍이 형과 한파 형이 온다는 사실을 산속 나무들에게 알리면 향이와 엄마도 알게 될 거고, 그러면 아마 엄마는 눈이가 키를 키우지 못하도록 막을 겁니다. 그래도 강풍이 형이 온다는 사실을 알리기는 해야 하는데….
고민하던 눈이의 머릿속으로 지난번 단풍이가 자신을 놀리던 말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넌 이 산에서 제일 작고 색깔도 잡초처럼 시시해. 푸하하하!’
놀림받았던 일이 떠오르자 눈이의 속이 부글거립니다. 눈이는 다짐합니다. 강풍이 형이 오든 말든 자신은 키를 키우는 데 열중하겠다고요.
#3
알록달록 예쁜 단풍잎으로 물들어 있던 겸손산이 새하얀 눈옷을 입었습니다. 눈이는 겨울이 깊어갈수록 불안해집니다. 분명 키도 더 컸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강풍이 형이 온다는 사실을 산속 나무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에 죄책감이 들어서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린다면 눈이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눈이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이 바로 옆까지 뿌리를 넓힌
향이가 말을 겁니다.
“눈아, 계속 높게만 자랄 거야? 엄마가 걱정하셔. 이러다 강풍이 형이 와서 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화들짝 놀란 눈이가 잎을 세우고 향이를 째려봅니다.
“너 지금 나 무시하니? 요즘 다른 나무들한테 칭찬받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
안 그래도 예민한 시기에, 자꾸 자기 쪽으로 뿌리를 내리는 향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정곡을 찔리고 나니 향이의 걱정이 눈이에게는 시비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당황한 향이가 잎을 내젓습니다.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됐어. 앞으로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마. 그리고 네 뿌리 좀 저쪽으로 치워! 왜 자꾸 내 뿌리 옆으로 오는 거야? 좁아 죽겠어!”
“아, 미안해.”
향이가 사과하자 눈이도 향이에게 너무 심했나 싶어 자신도 사과할까 하다가 얼른 고개를 내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