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햇살이 둘의 얼굴에 내리쬡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오를 노려보던 레테가 피식 웃으며 말합니다.
“나오, 넌 매사에 너무 진지해. 극상품 포도를 얻을 생각이 아니라면 쉬엄쉬엄해도 되잖아. 어차피 성주님도 우리가 게으름 피울까 봐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건 거라고. 수확이 많으면 성주님도 좋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레테 너도 분명히 들었잖아. 성주님이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나오는 어떻게든 레테를 설득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레테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시겠지. 극상품 포도를 수확하면 이 밭을 주겠다고 하셨으니 말이야. 중요한 건 극상품 포도는 아무나 수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쉬엄쉬엄하자고. 오늘 못 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 하면 모레 하면 되잖아. 안 그래?”
이미 결론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는 레테에게 나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설령 네 말처럼 극상품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이 포도원을 잘 가꾸어야 할 책임이 있어.”
책임이라는 말에 레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집니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면서 항상 더 많이 알고, 더 어른처럼 구는 나오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레테가 몸을 돌려 나오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책임?”
이번에는 나오도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레테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오! 우리는 이 포도원의 주인이 아냐. 책임은 주인이 지는 거라고!”
나오는 이제야 레테가 농사에 늘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이방인처럼 겉돌며 하나가 되지 못했던 모습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 나중엔 정말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어. 나도 불안하고 걱정돼. 하지만 그동안 보고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하면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믿어.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자, 레테!”
“….”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오를 보며 레테의 표정이 더 차갑게 변합니다. 나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동의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늘 허둥대는 자신과 달리 매사에 차분한 나오가 오늘따라 더 밉습니다. 나오를 뒤로 한 채 포도원을 나서는 레테의 눈에 길게 자란 덩굴이 지지대에서 삐죽이 떨어져 나와 있는 게 보입니다. 레테는 신경질적으로 덩굴을 끊어서 바닥에 던져버립니다.
#3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낮에 나오와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레테는 쉬 잠들지 못합니다.
후둑, 후두둑!
해질 무렵에 온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구름이 결국 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레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빗줄기를 확인합니다.
쏴아!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대비가 되어 퍼붓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깔렸던 농가에 하나둘 불이 켜지더니 막 잠에서 깨어난 농부들이 삽을 들고 집을 나서는 모습이 보입니다. 포도밭에 배수로를 내기 위해서입니다. 일과를 마치고 포도원을 나오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 퍼뜩 레테의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먹구름이 심상치 않은데 혹시 모르니 배수로를 미리 내두면 어떨까?”
낮에 일로 화가 나 있던 레테가 나오의 말을 뾰족하게 되받아쳤습니다.
“비가 올지 안 올지, 많이 올지 적게 올지도 모르는데 포도원 전체 배수구를 지금 파놓자는 거야? 나오, 넌 왜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니? 비가 많이 오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나는 피곤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려면 너 혼자 해!”
발을 쾅쾅 굴리며 레테가 포도원을 벗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오는 삽을 들고 다시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레테가 그때 일을 후회하며 겉옷을 입고 삽을 챙겨 집을 나섭니다. 혹시 나오가 배수로를 파놓지 않았다면 포도원은 금세 물바다가 될 겁니다.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거세집니다. 빗속을 뛰어 포도원에 도착해 보니 잠깐 동안 쏟아진 폭우로 포도원 주위에 성난 물줄기가 휘돌아 쳤지만 포도원 안까지는 들어차지 않았습니다. 나오가 배수로를 다 파둔 게 확실합니다. 묶어둔 덩굴이 풀린 곳은 없는지, 지지대가 넘어진 곳은 없는지 천천히 살피다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흠칫 놀랍니다. 자세히 보니 나오입니다. 포도원을 둘러보던 나오도 레테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췄습니다. 잠깐이지만 둘 사이에 정적이 흐릅니다. 정적을 깬 건 레테입니다.
“나오! 낮에는 내가 미안했다. 너무 감정적으로 대했어.”
빗소리에 묻힐까 봐 레테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나오가 빙긋 웃으며 대답합니다.
“아니야, 레테. 내 생각만 옳다고 내세워서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어. 내일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주위는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는 것을요.
#4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나오와 레테의 포도원에도 검보랏빛 탐스러운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오늘은 왕궁에서 돌아온 마빅이 포도원을 둘러보는 날입니다. 아침부터 나오와 레테는 포도를 따느라 분주합니다. 다른 포도원을 먼저 둘러본 마빅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오와 레테의 포도원을 찾았습니다. 마빅은 덩굴에 열린 포도 중 한 송이를 따서 향을 맡아보고 햇빛에 비춰봅니다. 레테와 나오는 마빅의 뒤를 따르며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합니다. 포도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던 마빅이 포도 한 알을 떼어서 깨물어봅니다. 상쾌한 소리와 함께 탱탱한 껍질이 터지며 과즙이 흐릅니다. 숨죽여 이 광경을 지켜보던 레테는 마구 방망이질하는 심장 소리가 주위에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윽고 마빅이 입을 엽니다.
“나오, 레테. 포도를 아주 잘 키웠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구나. 축하한다! 극상품 포도다.”
레테와 나오는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릅니다.
“올해 왕궁에 올릴 포도에 너희 것도 포함시키마. 둘이 이제 아주 바빠지겠구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둘이 마빅을 쳐다봅니다.
“너희들 농사를 지으려면 내일부터 다시 준비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마빅의 말에 레테와 나오가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지릅니다. 기뻐하는 둘의 모습에 마빅도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포도원을 지나던 참새 한 마리가 수확이 끝난 포도 덩굴에 살포시 내려 앉아 지친 날개를 쉬고, 달콤한 포도 향을 실은 바람이 그동안 수고한 레테와 나오의 땀을 식히며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