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는 저무는 해를 따라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머릿속은 토끼, 혹은 다람쥐로 살려면 뭐부터 하면 좋을지 고민하느라 바빴습니다. 먼저는 고슴도치로 안 보이는 게 제일 중요했습니다. 고슴도치의 상징인 가시 망토부터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시를 세우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냥 거친 털 코트 정도로 보이게요. 때마침 겨울도 가까웠으니 괜찮은 방법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만족스러운 치치는 그제야 답답하던 속이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야!”
땅만 보며 걷던 치치는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다가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너 정도면 입 아플 일은 없겠군.”
독사가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렸습니다.
#5
어쩌면 치치는 이대로 떠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동고는 부랴부랴 치치의 뒤를 쫓았습니다. 치치의 질문에 이제 막 답이 떠올랐습니다.
“치치!”
멀리서 치치를 발견한 동고는 괜히 반가워서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러다 치치 앞에 등장한 독사를 보고는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치는 얼음이 되었습니다. 머릿속에는 동고가 한 적도 없는 말이 동고의 목소리로 울렸습니다.
‘가시는 이럴 때 쓰는 거야!’
일종의 경보음이었습니다. 치치는 만에 하나 가시를 세우는 순간, 기세 좋게 고슴도치의 삶을 떠나겠다고 했던 제 꼴이 우스워질 것을 알았습니다.
‘어떡하지?’
체면보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맹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시를 세우려고 해도 망토는 잠잠하기만 했습니다.
“겁먹었구만? 무기라고 딱 하나 있는 걸 써보지도 못하고.”
낄낄대는 독사를 벌벌 떨며 쳐다보는 일 외에 치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날 너무 원망 마라. 시간은 충분했잖아?”
독사의 입이 쩌억 하고 벌어졌습니다. 양쪽 송곳니에서 맹독이 방울져 뚝뚝 떨어졌습니다. 치치는 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머, 멈춰! 도, 독사 같은 놈!”
독사한테 독사 같은 놈이라니. 치치는 어쩐지 동고가 떠올랐습니다. 적절하게 등장해준 누군가가 말도 못하게 고마웠지만 몹시 어리숙했습니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풀어진 틈을 타 치치는 슬쩍 실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정말이었습니다.
“동고!”
치치 앞을 가로막은 동고가 콧김을 쉭쉭 뿜으며 가시 망토 안으로 몸을 말아넣었습니다. 동고의 몸을 애워싼 가시들이 빈틈없이 일어났습니다. 동고의 몸집은 더욱 거대해졌습니다.
맹독을 뿜던 독사는 조신하게 입을 다물더니 분한 기색도 없이 도망쳐 사라졌습니다. 목숨이 위태롭던 상황이 동고의 등장만으로 가뿐하게 정리된 것입니다. 치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일생일대의 사건입니다. 고슴도치가 멋있다니!
“치, 치치야! 개, 괜,”
“괜찮아요.”
독사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망토 밖으로 고개를 내민 동고가 얼른 치치를 부축했습니다. 치치는 몸을 일으키며 동고를 바라봅니다. 여전히 긴장한 채 말을 더듬고, 얼굴은 팽팽한 가시의 힘에 눌려 더 쭈굴쭈굴합니다. 그런데도 멋집니다.
치치는 창피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고슴도치로서 제대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시를 세우는 법조차 모르니까요. 그러면서 다 아는 듯이 굴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싫은 오해를 자신부터가 했습니다. 동고는 숨어 사는 듯해도 필요하면 언제든 밖으로 나갑니다. 용기를 발휘해야 할 순간도 놓치지 않습니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는 숱한 오해 속에서 동족들은 동고처럼 꿋꿋이 고슴도치의 삶을 살아갑니다.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이렇답니다’ 혹은 ‘오해는 뭐가 됐든 오해일 뿐이에요’라는 진실을 매 순간 온몸으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고슴도치는 고슴도치답게 살면 됩니다. 고슴도치로 태어나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는 건 처음부터 가능하지도 않았고요.
“고마워요.”
치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듯했습니다. 동고의 가시가 풀썩 내려앉았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동고는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행이었지만 무엇보다 동고는 치치를 구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
“응?”
치치는 망설였습니다. 아까 동고에게 쏟아냈던 막말 중에는 다시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좀 낯간지러웠습니다. 치치는 먼 산을 바라보며 후다닥 말했습니다.
“그,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어요.”
치치의 가시들이 삐쭉빼쭉 솟았습니다. 동고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앞으로 이 꼬마 고슴도치는 가시 사용법과 더불어 점잖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