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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부지 둠벙

2023.01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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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 집 뒷산 비탈진 곳에는 층층이 다랑이 논이 있었다. 그 논배미 아래에는 저수지보다는 작고 큰 연못만 한 둠벙이 있었다. 그 둠벙을 우리는 아부지 둠벙이라고 불렀다. 아부지 둠벙은 마치 우주가 녹아 있는 듯 아름다웠다. 밤이면 둥근달도 멱을 감고 별들도 우수수 내려와 헤엄쳤다. 둠벙가에는 철 따라 들꽃이 무리 지어 피었는데 하얀 찔레꽃이 꽃잎을 떨굴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나비들의 잔치, 잠자리들의 비상… 작고 여린 생물이 거기서 생을 피웠다. 각시붕어, 다슬기, 우렁이도 살고 개구리는 둠벙가에 진 치고 밤낮으로 울어댔다.

    겨울이면 둠벙은 제 몸을 꽁꽁 얼려 우리에게 썰매장을 선물했다. 비료 포대를 타고 때로는 사과 궤짝을 타고 우리들은 얼음밭이 된 둠벙을 신나게 지치며 놀았다. 둠벙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끊임없이 내주기만 했다. 그런 보화 같은 둠벙을 가지고 있어도 산골짜기 다랑논은 인기가 없었다. 어쩌면 인기가 없어서 가난한 농사꾼인 우리 아버지의 차지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물을 대주는 둠벙은 우리 가족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여름에 가뭄이라도 들면 아버지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밤새 양수기로 둠벙 물을 퍼 올렸다. 둠벙 옆에는 커다란 넓적 바위가 있어 그곳이 아버지의 간이 침실이었다. 어머니는 넓적 바위로 식사와 새참을 내다 드렸고 아버지는 농사철이면 다랑논에 파묻혀 사셨다.

    아버지는 뒷산에서 염소도 기르셨는데 한낮이 되면 스무 마리 남짓 되는 염소를 몰고 와 구름이 떠 있는 둠벙에서 물을 먹이셨다. 염소들이 목을 축일 때면 구름 뒤에 숨어 있던 해도 나와 물 위에 떠서 인자하게 웃었다.

    염소들은 아버지의 땀과 정성으로 튼실하게 자랐다. 우리 집 염소는 산 냄새 맡으며 약초 뜯어 먹고 자라서 다른 집 염소보다 병도 잘 안 걸리고 푸른 솔잎처럼 반질반질 윤기가 났다. 제멋대로인 염소들을 방목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리를 이탈하는 녀석이나, 나무에 목줄을 칭칭 감아대는 염소의 습성 때문에 아버지는 잠시도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는 염소들을 건강하게 기르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염소들도 그걸 아는지 아버지가 읍내에 있는 장에 저들을 내다 팔러 갈 때는 오 리도 더 되는 길을 워어이 워어이 구령에 맞춰 잘도 따라갔다.

    가끔 아버지가 읍내에서 더 먼 이십 리 길 장에 갈 때는 짐바리라고 부르는 자전거에 염소를 싣고 다니셨다. 자전거가 가려질 정도로 커다란 나무 궤짝에 염소를 싣고 포장도 안 된 도로를 달려야 했다. 온종일 자전거 페달을 굴리느라 힘을 썼던 아버지는 밤이 되면 엉덩이뼈가 아려 고통스러워하셨다. 언니 오빠와 나는 엎드려 계신 아버지의 엉덩이뼈를 절구질하듯 나무망치로 안마해 드렸다.

    장남인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 진학도 못 하시고 동생들 뒷바라지로 어린 나이에 장사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배움의 열정이 크셨다. 우리들이 다 쓴 공책은 그냥 버려지는 법이 없었다. 몸이 고단해 일찍 잠자리에 드셨지만 항상 우리가 잠든 후에 일어나셔서 희미한 백열등 아래에서 공부하셨다. 우리가 연필로 쓴 공책에는 다시 아버지가 볼펜으로 쓴 한자가 빼곡했다. 다음 날 아침, 하룻밤 사이 몽땅 한자밭이 된 내 공책을 보면 정말 신기했다. 아버지는 동의보감, 법률책, 백과사전도 구해 오셔서 밤새워 공부하셨다. 내가 자다가 부스스 일어나면 창호에 비친 아버지의 그림자는 한 폭의 수묵화로 걸려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교정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처럼 자랑스러웠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찬송가를 불렀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돌아가며 찬송을 부르게 하고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 우리 노래를 녹음하셨다. 녹음된 소리를 틀어주시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깔깔 웃어댔다. 모든 게 궁핍했던 살림이 누렇게 바랜 음악 노트라면, 온 가족이 모인 그 시간은 악보들이 웃으며 날개를 펼치고 춤을 추는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녹음된 노랫소리를 듣고 우리가 마음껏 웃어대도록 자식들에게 저녁마다 작은 행복을 지어주셨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고향 집 아부지 둠벙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둠벙이셨다. 온 우주를 잔잔히 품고 보이지 않게 뼛속 깊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푼 둠벙이셨다.

    아부지 둠벙,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영원히 살아 있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고향 냄새, 아버지 냄새를 품고 각시붕어처럼 튀어나와 가슴 밑바닥에 울컥 내려앉는다. 그립고 보고픈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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