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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내리사랑

2020.0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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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 기간이라 매일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고등학생 딸아이를 위해 크림수프를 끓이기로 했다. 평소라면 새벽 시간에 간식을 찾는 딸에게 속도 불편하고 살찐다며 오히려 핀잔을 줬겠지만, 오늘 아침 학교 가는 딸의 얼굴이 꺼칠해 보여 내내 마음에 걸렸다.

    수프 가루와 우유, 물을 냄비에 붓고 불을 켰다. 따뜻한 수프를 먹으며 딸아이가 추위에 빨갛게 언 몸을 녹일 거라는 생각에 괜히 좋은 엄마가 된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수프가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휘휘 저어주다가, 문득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던 아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첫 출산과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친정엄마는 출산 예정일보다 빨리 우리 집으로 오셨다. 아기를 만난 감동도 잠시, 밤낮없이 울어대는 작은 생명 덕분에 우리 부부와 엄마의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엄마는 당시 모유 수유를 하던 나를 위해 매끼 미역국은 물론, 모유에 좋다는 가물치, 족발 등을 고느라 불 앞에 서 있는 날이 많았다. 철없던 나는 엄마니까 당연히 저렇게 하는가 보다 여기며 코앞까지 차려온 밥상을 받아 먹으면서도 감사하다는 인사 한번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아이에게만 관심을 쏟을 뿐이었다.

    어느 늦은 밤, 주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싱크대에서 물소리가 계속 났다.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나가니 엄마가 한겨울에 찬물을 틀어놓고 손을 식히고 계셨다. 잦은 모유 수유로 혹시 내가 배고플까 봐 야참으로 크림수프를 끓이다가 냄비 손잡이를 잘못 치는 바람에 엄마 손에 수프가 쏟아진 거였다. 엄마의 손은 벌겋다 못해 피부가 녹아내린 것처럼 보였다. 잠든 남편을 깨워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라고 했지만, 엄마는 찬물에 화기만 빼면 된다며 끝까지 버티셨다. 산후조리 중이라 외출이 힘들었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속상해서 눈물만 줄줄 흘렸다. 급한 대로 남편이 약국에서 사 온 화상 연고를 손등에 발라드렸다. 얼마나 화끈거리고 아프실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파서 연고를 발라드리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 낳고 울면 눈 나빠진다’며 오히려 나를 걱정하셨다.

    벌써 18년이나 지난 이야기지만 엄마의 손등에는 그날 사고로 생긴 거뭇거뭇한 화상 자국이 남아 있다. 상처를 볼 때면 죄송한 마음에 아직도 가슴이 아린데 엄마는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신다.

    딸아이를 키우며 함께했던 모든 순간, 심지어 사춘기 아이의 말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조차 내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엄마도 나와 함께했던 순간들로 당신의 인생을 가득 채우고 있으리라. 아픈 기억까지 귀하게 여기면서.

    오늘도 나는 엄마에게 받았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딸에게 ‘내리사랑’이라는 걸 흉내 내는 중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은 엄마도 엄마의 엄마에게 배운 것이겠지. 이젠 나도 안다. 엄마들의 내리사랑, 그 시작에는 하늘 어머니가 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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