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명의 훈련병 중 수색 교육대에 세 번 재입교한 정한필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입소 기간 중 정밀신체검사에서 탈락해 귀가 조치되었고, 두 번째는 저체온증으로 수영에 적응하지 못해 퇴소당했다. 하지만 수색대원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도전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했다. 해병대 출신들이 대개 그렇듯 한필의 아버지도 민국의 아버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투철한 군인 정신의 소유자였고 자부심이 강했다. 체력이 약한 것도 미덥지 못한데, 비슷한 부자 관계에서 자신과 다르게 아버지를 생각하는 한필이 민국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필은 그런 민국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민국은 극기주 훈련을 하면서 한필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훈련병들과도 마찬가지였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전우애는 나날이 진해졌다. 하지만 진한 전우애도 막무가내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했다. 잠을 못 자는 날이 계속되면서 환시나 환청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는 지금 가상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전이다. 정신이 살아야 육체가 산다!”
교관의 고함에도, 물벼락을 퍼부어도 잠은 쏟아졌다. 누군가 ‘어머니의 마음’을 불렀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하나둘 따라 부르며 노래는 삽시간에 밤하늘로 메아리쳤다. 잠이 깬 훈련병들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참았던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틈에서 민국은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탈출 학도병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힘든 대장정을 마쳤던 그. 그가 왜 어머니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 더불어 아버지가 존경하던 독립군들의 화염보다 뜨거운 전우애와 군인 정신이 더 이상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5
훈련 중 부상자가 발생하면 의무관의 판정에 따라 철수 명령이 내려진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고 위로해도 중도에서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에 부상병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교육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한 46명의 이름이 내무반 명단에서 지워졌다.
마지막으로 가면서 체력은 한계점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훈련 강도는 더욱 세졌다.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훈병들에게는 오직 전진만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악문 전진 끝에, 남은 훈련병들은 기어이 목표지점에 도달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극기주 훈련은 끝이 났다.
“자신을 이기고 최후의 승자가 된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날의 건강과 무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필승!”
교육대장이 극기주 종료를 선포하자 훈련병들은 함성소리와 함께 모두가 얼싸안았다. 젊기에,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도 손을 놓치 않았던 동료가 있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민국은 한필의 손을 맞잡았다.
훈련교관들은 각자 맡은 소대를 돌며 훈련병의 가슴 오른쪽에 붙은 노란색 명찰 위로 빨간 명찰을 하나씩 덧달아주었다.
“그동안 고생했다.”
그 한마디에 눈시울을 붉히지 않는 훈련병은 없었다. 민국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내무반에 들어선 민국은 살에 착 달라붙어 가죽처럼 된 양말을 벗겼다. 눌어붙은 피부 위에 하얗게 소금이 절어 있었다. 방파제가 닳도록 수영 연습을 하고 고무보트를 머리 위에 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지난 며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느 한구석 성한 곳이 없는 발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아빠 발은 왜 이렇게 못 생겼어?”
사춘기를 겪기 전까지만 해도 민국과 아버지의 사이는 좋았다. 어린 민국은 재잘재잘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왜, 아빠 발이 이상해?”
“응.”
“이게 다 우리 민국이 지켜주느라 생긴 훈장이지.”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지켜준 훈장….’
민국은 여기 저기 상처와 굳은살투성이던 아버지의 발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에도 아들과 가정과 이 나라를 지키느라 아버지의 훈장은 더 늘었을 테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발은 더 이상 민국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6
민국이 아버지의 발을 다시 본 곳은 병원이었다. 소식을 듣고 휴가를 얻어 나온 민국은 죽은 듯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망연자실했다.
며칠을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민국은 아버지의 발을 자주 주물러드렸다. 훈장이 굳게 박인 아버지의 발은 더 이상 못 생긴 발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었다. 민국은 아버지의 발을 쥘 때마다 다짐했다. 자신도 영예로운 발을 가진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 아버지 앞에 서겠다고.
그 후, 부대로 복귀한 민국은 더욱 이를 악물고 군 생활에 임했다. 추위, 배고픔, 졸음, 공포, 고통, 인간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열악한 환경을 극복할 체력과 정신력을 배양하는 시간은 그야말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민국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또한 자신의 의지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강인한 의지로 깨어나기만을 민국은 간절히 바랐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전역하는 아들을 맞았다. 부쩍 수척해진 어머니는 그사이 반백이 다 되어 있었다. 어머니에게 잠이나 휴식이란 없었다.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에게 코로 연결된 튜브를 통해 물과 음식을 먹여주고, 씻겨주고, 침상을 갈아주고, 욕창 방지를 위해 2시간마다 자세를 바꾸는 모든 것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필승! 신고합니다!”
병원이라는 공간적 제약 때문에 민국의 전역 신고는 우렁찰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강렬했고 눈빛은 형형했다.
“우리 아들, 대단하네.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아들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민국은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한번 전역 신고를 했다. 그때였다.
“어, 발가락…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발가락이 움직였어요!”
민국이 엉겹결에 소리를 질렀다. 발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국은 침착하게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눈 좀 깜빡여 보세요.”
아버지가 눈을 깜박였다. 한 번, 또 한 번.
“제가 누군가 알아보시겠어요?”
아버지는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을 알아본 것이었다. 아들의 손을 잡은 어머니는 몸을 떨었다. 어머니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렀다. 민국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병실에 들어선 간호사가 놀란 눈을 하고 달려나갔다.
#7
아직 이른 새벽, 시외버스터미널 입구에 몰려온 택시와 차량들이 서로 길을 비켜달라며 조급하게 경적을 울려댔다. 안전 보호막으로 가린 건설 현장으로 크레인이며 레미콘차가 분주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출발 시간이 임박한 승객들이 서로를 부르며 승강장에 달려 들어왔다. 짐 보따리를 가득 챙긴 어머니 부대 여행객들이 왁자하게 웃고 떠들며 대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취객과 오토바이 퀵 배달 기사와의 실랑이가 벌어져 티격태격이 한창이었다.
“군 가족 보안 교육 때나 볼 수 있겠구나.”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민국은 아버지를 깊게 포옹했다. 직업 군인의 길을 택한 민국은 최종 면접에서 합격했다. 해병대 부사관 정복을 입은 아들이 아버지는 자랑스러웠다.
“이제부터는 제가 이 나라를 지키겠습니다. 염려 마시고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십시오! 필승!”
민국은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젊은 해병은 늠름하고 대견했다. 아들이 탄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을 흔들었다. 민국은 맑고 깊은 눈동자로 그 모습을 담았다. 버스가 출발할 즈음, 사위가 서서히 밝아왔다. 찬란한 새 아침의 동이 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