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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떨산이 이야기 上

2023.06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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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미애는 장바구니를 식탁에 내려놓고 다른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여다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봉지 안에는 손가락만 한 잎을 단 상추 모종이 들어 있었다. 식물 키우는 데 소질이 없어서 꽃 화분 하나 손수 산 적이 없는데, 유별난 취미를 가진 아들 덕분에 상추를 기르게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미애는 화분에 배양토와 상추 모종을 담아 베란다로 나갔다. 거실 한쪽에 자리한 수조에서는, 처음 집에 올 때보다 몸집이 두 배나 자란 거북이 움츠렸던 목을 쭉 빼고 미애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오월의 햇살이 미애의 이마 위로 쏟아져 눈을 뜰 수 없었다. 손 그늘을 만들어서 겨우 실눈을 뜨고 원예 영상을 보며 상추 모종을 따라 심었다. 채소 값이 올라서 장 볼 때마다 손이 떨렸는데, 모종을 잘 키우면 적어도 귀뚜라미 먹이용 채소는 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모종을 심고 부엌으로 간 미애는 마른 미역을 물에 불려두고 시장에서 산 것을 식탁 위에 하나씩 꺼냈다.

    수민의 성화에 못 이겨 미리 선물을 사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생일날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일찍 오라고 했으니 오랜만에 네 식구가 저녁을 먹을 터였다. 오늘은 특별히 수민이 좋아하는 것으로 저녁상을 준비했다. 불고기와 과일 샐러드, 돈가스, 두부조림으로 저녁을 차리는 동안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뉘엿뉘엿 저물었다.

    해그림자가 거실에 길게 드리워질 때쯤 수민이 집에 돌아왔다. 수민은 미애에게 짧은 인사만 건네고 자기 방으로 곧장 들어가 고슴도치 집을 들고 나왔다. 수민이 고슴도치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관찰 일지를 쓸 거야. 내일 수업 시간에 친구들에게 널 자랑할 거거든!”

    미애가 관심을 보이며 수민의 옆으로 갔다. 수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하지만 수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고슴도치를 보지 않았다. 대신 수민에게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았다.

    “내 눈에 안 띄게 해라. 안 그러면 너 없을 때 갖다 버릴 거야!”

    수아는 사춘기에 들면서 부쩍 신경질이 늘었다. 다섯 살 터울의 수민을 예뻐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웃어넘길 만한 일도 뾰족하게 굴어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수민이 수아의 위협(?)에 입을 삐죽이면서도 달리 대꾸하지 않은 것은, 고슴도치에 앞서 거북을 집에 들였을 때 수아의 반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민이 관찰 일지를 쓰는 동안 남편 정수가 도착했다. 수아는 학원 보충 수업이 있어 두어 시간 늦는다고 연락이 와서 셋이 저녁상에 앉았다.

    “생일 축하해, 아들. 고슴도치는 잘 크고 있니? 며칠 바빠서 못 봤네.”

    “보여드릴까요?”

    수민은 고슴도치 집을 들고 나왔다. 수아가 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수아랑은 인사했니?”

    “누나는 징그럽고 냄새나서 싫대요. 자기가 집에 있을 때는 무조건 방에서 가지고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칫!”

    “거북이 처음 봤을 때도 그러더니…. 그래도 요즘은 밥도 한 번씩 챙겨주던데?”

    정수의 말처럼 첫 대면은 요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아도 거북에게 조금씩 관심을 보였다. 수조 옆에 둔 먹이를 몇 알 던져주기도 하고 자기가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북이 귀엽다고도 했다.

    “조금 지나면 수아도 괜찮아질 거야. 그때 정식으로 인사시키는 거지. 어때?”

    수민은 정수의 말에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씩 웃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수민은 거실을 돌며 화초와 거북에게 고슴도치를 인사시키고, 내일 수업 때 읽으려고 쓴 관찰 일지도 미애와 정수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다.

    띠, 띠, 띠, 띠.

    “어, 누나다!”

    말릴 겨를도 없이 수민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2
    “누나, 고슴도치랑 인사….”

    “아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아의 짧은 비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고슴도치 집이 탁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수아는 고슴도치를 보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그저 ‘고슴도치’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는 순간 눈을 감으며 팔을 허공에 휘둘렀고, 수민이 수아의 팔을 피하려다 고슴도치 집을 놓친 것이었다. 수민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야, 이수민! 내 눈에 안 띄게 하라고 했지?”

    수아의 날 선 목소리가 정지된 거실 공기를 가르는 동안 수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로우비디오를 재생하다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1초, 2초, 3초….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던 긴장감이 일순간 끊어지며 수민의 시선이 고슴도치 집에 고정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고슴도치는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슴도치가 이상해.”

    수민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수아를 째려봤다.

    “그러니까 그걸 왜 코앞에 갖다 대냐고?”

    “으앙! 고슴도치가 이상해. 누나 미워.”

    수민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수아도 억울한지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먼저 들이댔잖아!”

    미애는 정수에게 수민을 부탁하고 수아를 데리고 방으로 갔다. 하지만 수아는 방에 들어와서도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발을 퉁탕거렸다.

    “많이 놀랐어?”

    “아, 몰라. 안 그래도 내일 시험 때문에 짜증 나 죽겠는데….”

    수아는 몸을 홱 돌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화가 나면 입부터 닫는 수아의 성격을 알기에 미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거실에서는 정수가 고슴도치 상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조금 전 충격으로 먹이통과 물통, 은신처까지 뒤죽박죽이 된 데다 집 귀퉁이도 깨져 있었다. 급한 대로 깨진 곳을 청색 테이프로 막으며 정수가 수민을 달랬다.

    “고슴도치는 괜찮으니까 걱정 마. 집은 아빠가 내일 멋진 걸로 사 올게. 약속!”

    퉁퉁 부은 눈으로 정수를 바라보던 수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예보에 없던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라 생각했던 미애는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밤새 잠을 설친 미애는 일찍 주방으로 나왔다. 미역국에 불을 켠 후 어제 난리통에 저녁도 먹지 않고 잠든 수아를 위해 달걀찜을 하려고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냈다. 함께 꺼낸 쪽파 몇 가닥을 총총 썰고 유리그릇에 달걀 세 개를 깨뜨렸다. 소금을 세 꼬집 넣고 달걀을 막 풀려는데 수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미애는 그릇을 떨어뜨리다시피 내려놓고 달려갔다. 무슨 일인지 수아는 화장실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무슨 일이니?”

    겁에 질린 모습으로 엄마를 부르던 수아는 미애를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화장실 문 바로 앞에 고슴도치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곳에 시선이 닿은 미애는 깜짝 놀랐다.

    “여보, 여보!”

    미애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수는 잠이 덜 깬 채 밖으로 뛰어왔다. 수민도 나왔다. 정수는 꼼짝하지 않고 한 곳을 응시하는 두 모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미애는 그 상황에서 웃음이 터진 정수가 못마땅했다.

    “웃지 말고 얼른 잡아요!”

    “허허, 고슴도치가 수아한테 아침 인사 하러 나왔나 보네.”

    정수가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농담을 던지자 잠결에 나온 수민이 거들었다.

    “누나가 싫어하니까 친해지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잖아.”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한 수민의 이 한마디로 상황은 급물살을 탔다.

    “누가 친해지고 싶대? 에이!”

    휙! 수아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뭉쳐 고슴도치를 향해 내던졌다. 수건은 고슴도치를 스치듯 비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몸을 둥글게 말고 가시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고슴도치가 위협을 느꼈는지 재빨리 움직였다. 고슴도치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수아가 몸을 기우뚱하다 벌러덩 넘어졌다.

    “엄마야!”


    하필이면 넘어지는 수아의 발에 맞았는지 고슴도치가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어, 고슴도치가 맞았어.”

    “으악, 내 발!”

    수민과 수아가 동시에 소리 질렀다.

    “누나 때문에 또 다쳤잖아, 으앙!”

    정수는 울음이 터진 수민을 데리고 방으로 갔다. 수아는 자기 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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