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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프로 참석러의 바쁜 게으름 下

2023.0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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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휴!”

    발표를 듣던 실장님이 짧은 한숨을 뱉자, 더듬더듬 발표를 이어가던 승재도 입을 닫았다. 실장님 낯빛이 어두워진 걸 느낀 사람은 승재만이 아니었다.

    “자료를 몇 번 살펴봤어요?”

    “아… 네, 음…. 한 번은 다 봤고, 두 번째 보는 중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끝부분을 조금 못 봤습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승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장님은 들고 있던 리포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되물었다.

    “두 번?”

    “네, 거의 다 보기는 했는데요.”

    “두 달 전에 낸 과제를 두 번도 못 봤다는 말인가요? 혹시 팀원들이 자료 조사를 늦게 해서 정리한 내용을 살펴볼 시간이 없었나요?”

    정말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실장님은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은 채 승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닙니다. 자료 정리가 늦긴 했지만 그건 제 개인적인 일이 많아서….”

    “개인적인 일?”

    “음… 제가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인력 충원이 안 돼서 최근 일하는 시간을 좀 늘렸습니다. 하지만 실습시간에는 전혀 지장 없도록 조절해서 괜찮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실장님과 눈을 질끈 감는 민수를 번갈아 보며 승재는 말을 이어갔다.

    “아르바이트도 아르바이트지만 얼마 전까지 봉사 단체 일 때문에 좀 더 바빴습니다. 국제적인 행사가 있었는데 제가 진행 보조를 맡았거든요.”

    “봉사활동?”

    “네! 밀렵이나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멸종 동물들을 보호하는 단체에서 간사를 맡고 있습니다.”

    승재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혹시, 또 있나요? 개인적인 일?”

    실장님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승재에게 물었다.

    “네…. 있긴 한데.”

    사실 실장님은 승재의 대답이 궁금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대답은 이미 승재의 입술을 떠난 상태였다.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영상을 찍으려고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는 대답에 치료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간간이 들려오던 환자와 치료사의 대화는 물론 각종 치료기기의 기계음마저 심정지를 일으킨 것처럼 사라졌다.

    “영상 제작만 하면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 영상 제작 기술만 익히면 물리치료사는 저절로 되냐고 묻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국가자격증도 취득해야 하고, 임상 경험도 많이 쌓아야 합니다.”

    입을 굳게 다문 실장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승재를 바라보다가 발표 평가를 끝냈다. 이후 발표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승재를 대하는 동기들의 태도가 냉랭해진 건 확실했다. 결과야 어찌됐든 두 달을 끌어온 발표가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승재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오늘만큼은 모든 걸 다 잊고 단잠을 잘 거라는 기대로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중앙 침대로 모이세요!”

    실습생들 호출이 떨어진 건 퇴근을 30분 앞둔 때였다. 치료기기를 정리하던 승재와 민수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이동했다. 실습생들이 모이자 실장님은 승재에게 침대 위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오늘은 실습생이 나 좀 도와주세요.”

    치료실 중앙에 있는 침대는 운동치료용으로 제작되어 평상처럼 낮고 넓었다. 승재는 실장님의 코칭을 받아 편마비 환자에게 스트레칭을 실시했다.

    환자는 속이 불편한지 한 번씩 헛구역질을 해댔다. 일상적 대화를 나누며 환자의 상태를 살피던 실장님은 승재에게 환자를 반듯이 눕히라는 신호를 보냈다. 승재가 환자를 팔로 안아 바로 누이던 그때였다. 어깻죽지가 뜨듯해지는 걸 느낀 승재가 화들짝 놀라 환자를 감고 있던 팔을 확 풀어버렸다. 그 바람에 승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환자가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넘어갔다. 옆에 있던 실장님이 환자를 붙잡지 않았다면 2차 낙상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아이씨!”

    어느새 환자와 멀찍이 떨어진 승재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승재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환자를 째려보던 그 순간, 승재의 시야에 몸을 축 늘어뜨린 환자를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실장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왜….’

    등을 보이고 앉은 실장님의 옷과 팔도 완전히 젖은 상태였다.

    “괜찮아요. 속이 편해질 때까지 이대로 있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보호자와 치료사들이 주변 정리를 하려고 허둥대자 실장님은 환자가 놀라지 않게 그대로 있으라며 손짓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보호자를 도와, 안정을 되찾은 환자를 휠체어에 앉혀주었다. 보호자는 치료실을 나서기까지 연신 허리를 숙여 사과하며 가운을 세탁해 오겠다고 했지만, 실장님은 “우리 집 세탁기가 요즘 나보다 일을 더 안 해요”라며 웃음으로 청을 거절했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퇴근 시간만 기다렸던 승재였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때까지 탈의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누구는 웃는 얼굴로, 어떤 이는 무표정하게 승재에게 인사를 건네고 총총히 사라졌다. 막내 치료사의 구두 소리를 끝으로 치료실에도 고요가 찾아왔다. 그제야 승재는 자신의 사물함에서 가방을 꺼내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지하철은 제법 한산했다. 운 좋게 빈자리까지 나서 승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어깨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묵직했다. 여느 때라면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쪽잠을 자는 묘기를 펼쳤을 테지만, 오늘은 편히 앉아 두 눈을 감아도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했다. 한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5
    막내 치료사 선생님이 탈의실에 들어오기 전, 실장님이 먼저 들어왔다. 이미 옷을 갈아입은 승재는 실장님과 함께 풍겨온 시큼한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실장님은 그런 승재를 지나쳐 자신의 사물함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가기도, 그 자리에 서 있기도 불편한 시간이 흘렀다. 환복을 마친 실장님이 사물함을 잠그며 승재를 불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승재 실습생. 10년 뒤에 실습생은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

    “당연히… 물리치료사입니다.”

    “음, 그래요? 다른 일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가운이 든 가방을 들고 신발장으로 이동한 실장님은 구두를 꺼내고 실내화를 신발장에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정갈하게 닦인 구두가 승재 눈에 들어왔다.

    “그건 그냥 잠깐씩 하는 거라….”

    “음, 그럼 1년 뒤는 어떨까요?”

    실장님은 젖은 양말 때문에 잘 들어가지 않는 발을 구두에 욱여넣으며 물었다.

    “자격증을 취득해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래요? 정말 다른 선택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네!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눈앞의 상대에게 한다 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걸 승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이 그렇다니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치료사가 되기 위해 지금 실습생이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실장님이 원하는 답을 승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승재를 바라보던 실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실습생이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까워요. 본인 말처럼 의료인이 꿈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생명 살리는 일에 더 관심을 쏟고 그 분야에서 프로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중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하루 24시간을 이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쑥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으나 승재는 매일을 부지런히 살았다는 것에 대한 어필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또박또박 말했다.

    “하루 24시간을 모두 투자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루를 분초를 쪼개며 바쁘게 살아도 정작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미루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게으른 거예요.”

    #6
    다음 날 아침, 승재는 담담한 얼굴로 치료실에 들어섰다. 큼큼한 냄새만 승재를 반길 뿐,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치료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상쾌한 공기가 실내로 와르르 쏟아져 밤새 바닥에 고여 있던 공기를 반대편 창으로 밀어냈다. 실습복을 갈아입은 승재는 탕비실로 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 머신에 거름종이를 깔고 아침에 커피 전문점에서 산, 향이 근사한 원두를 채웠다. 스위치를 올리니 뜨거운 김이 오르며 은은한 커피 향이 치료실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이야! 오늘 커피 향이 좋은데!”

    “바리스타가 누구야?”

    치료실 선생님과 동기들의 들뜬 목소리가 아침의 활기를 더했다.

    “좋은 아침! 오픈 준비는 다 했어요?”

    말끔한 모습으로 치료실에 들어선 실장님이 짧은 인사와 함께 승재에게 물었다.

    “넵! 실장님.”

    승재는 이제 갓 입대한 신병처럼 힘차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의료인의 자격을 갖추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프로 참석러가 되겠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네요. 허허허.”

    환하게 웃는 승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실장님이 엄지를 추켜세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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