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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현장 감독 비버 下

2021.0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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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이제 어쩔 거야? 도면이 찢어졌잖아!”

    딱따구리가 계속 몰아세우자 토끼는 바닥만 쳐다봤습니다. 비버는 왠지 이 광경이 낯설지 않습니다. 일주일 전, 토끼를 심하게 몰아세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이라는 것이 좀 달랐습니다. 현장을 살피던 비버의 눈에 토끼 앞발의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토끼의 상처가 보이지 않는지 딱따구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날 선 말을 계속 퍼붓습니다.

    “도움이 안 될 거면 방해라도 말아야지! 일자리도 없는 현장에 기어이 들어와서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잖아!”

    딱따구리의 말처럼 토끼는 일꾼 배치가 모두 끝난 뒤에 현장에 들어왔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태풍 때문에 농작물이 다 휩쓸려가서 일자리가 필요했거든요. 애들도 많고….”

    “내가 당신 사정까지 알 게 뭐야? 꾀부리고 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감독님께 정식으로 해고 건의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 안 돼요. 여기서 나가면 일할 곳이 없어요!”

    토끼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딱따구리의 쇳소리가 사방으로 퍼집니다. 주위에 모여든 동물들도 상황만 지켜볼 뿐 쉽게 끼어들지 못합니다. 비버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나도 일꾼들을 저렇게 매몰차게 대했었나?’ 싶었거든요.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비버가 딱따구리에게 다가갑니다.

    “변명은 됐어. 아까도 말했지만, 감독님께 말해서….”

    “나를 찾나요?”

    비버의 목소리에 딱따구리가 눈을 반짝입니다.

    “마침 잘 오셨네요. 문제가 생겨서 감독님께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토끼가 중요한 도면을 망가뜨렸지 뭡니까! 안 그래도 요즘 일을 설렁설렁 해서 영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이참에 일을 그만두게 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중요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비버는 흙더미에 깔린 도면을 주워 흙을 털어냅니다. 여기저기 찢기고 더러워져서 보기가 힘듭니다.

    “도면이 찢어졌으니 문제가 생기긴 했네요. 그런데….”

    주위의 동물들이 일제히 비버를 쳐다봅니다. 비버는 토끼에게로 다가서며 핏자국이 선명한 토끼의 앞발을 천천히 살핍니다. 토끼의 앞발은 털이 뭉치고 빠져서 볼품없습니다.

    “이런 발로 땅을 팠군요. 처음 배정된 작업장이 그곳이었나요?”

    “아, 아닙니다. 제가 따로 기술이 없어서 여러 작업장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상처 난 발을 치료해야 할 것 같으니 일단 의무실로 가시죠. 두더지 반장님이 의무실에 함께 가주세요.”

    두더지와 토끼를 보내고, 비버가 딱따구리에게 묻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뭐죠? 시설 부장님.”

    생각과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던 딱따구리가 당황하며 대답합니다.

    “무, 문제요? 그러니까 토끼가 도면을 망가뜨린 거죠.”

    “그건 진짜 문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도면은 사무실에서 다시 가져오면 되니까요. 이미 여러 부 만들어놓은 걸 알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딱따구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진짜 문제는 토끼의 게으름입니다. 평소 게으름 피우는 걸 제가 많이 봤습니다. 땅을 팔 때도 사슴이 한 번 쉴 때 토끼는 두 번 쉬고, 자재를 나를 때도 다른 일꾼들보다 적게 나르고요. 방금 수레를 엎은 것도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바로 의무실에 가야 할 정도로 다친 토끼를 나무란 겁니까?”

    “이번에 충분히 주의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못된 꾀를 부리지 않게요. 애초에 토끼를 현장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요. 다들 기술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데 토끼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일하는 현장이 우리 마을이라는 것을 잊었나요? 태풍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동물들을 위해 마을을 재건하는 것이죠. 마을 재건은 건물만 다시 짓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동물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하는 목적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토끼를 현장에서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토끼도 이 마을의 일원이고 현장에 꼭 필요한 일꾼이니까요.”

    이야기를 마친 비버는 곧장 의무실로 갑니다. 의무실에서 치료받던 토끼는 비버의 방문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비버가 토끼를 자리에 앉힌 후, 가까이 다가가 토끼의 발을 유심히 살핍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다른 발은 부기가 좀 빠졌나요?”

    토끼는 생각지 않은 비버의 질문에 깜짝 놀랍니다. 조금 전 딱따구리가 비버 감독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 그게, 발이 부어서 땅파기가 조금 힘들어서 잠깐 쉰 걸 보고 시설 부장이 일을 설렁설렁 한다고 말한 겁니다. 감독님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저도 그렇게 말했었군요.”

    비버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부드러운 토끼의 발은 구덩이를 파는 일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비버는 머릿속에 현장 지도를 펼치고 토끼에게 적합한 일이 무언지 더듬어봅니다.

    “저… 그런데 감독님, 도면을 망친 거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나요?”

    토끼의 질문에 비버가 웃으며 대답합니다.

    “본인이 질책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니,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예전이랑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비버는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습니다.

    “제가 달라졌나요?”

    “음…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부드러워졌어요. 요즘은 늘 웃으시고 화도 잘 안 내잖아요. 오늘 저를 보러 와주신 것도 그렇고…. 일꾼들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져요.”

    토끼는 앞발을 주무르며 빙그레 웃습니다. 토끼와 인사를 나누고 의무실을 나온 비버는 주머니에서 영감님이 준 쪽지를 꺼내 보며 씨익 웃습니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세 번째 숙제의 해답을 찾은 듯합니다.



    #4
    한 달이 지났습니다. 비버는 전보다 더 바빠졌습니다. 현장을 둘러보는 일 외에도 신경 쓰는 일이 하나 더 늘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약속대로 부엉이 영감님이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고요.”

    부엉이 영감님과 비버는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마을로 향합니다. 현장에 들어선 영감님은 한 달 전보다 공사가 많이 진행되었다는 걸 한눈에 알아봅니다. 이렇게 빠르게 마을이 재건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놀랍기만 합니다. 일꾼들의 표정도 확실히 밝아졌습니다.

    산양은 이제 더 이상 안전모를 뿔에 걸쳐두지 않습니다. 뿔에 맞춰 안전모에 구멍을 뚫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덩치가 큰 곰도 몸에 딱 맞는 작업 조끼를 입고 있습니다. 마침 토끼가 보송보송한 털을 휘날리며 둘 앞을 지나갑니다.

    “안녕하세요, 영감님!”

    “오! 그래. 잘 지냈는가?”

    “네, 감독님이 저에게 꼭 맞는 일을 찾아주셔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을 하지?”

    “제가 달리기를 잘한다고 현장들 간에 소식 전하는 일을 맡겨주셨어요. 매일 이렇게 신나게 달리니 정말 좋습니다.”

    토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합니다. 마침 사이렌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동물들이 현장에 세워진 천막으로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부엉이 영감님은 비버에게 천막의 용도를 묻습니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져서요. 쉬는 시간이라도 모두 따뜻하게 쉴 수 있도록 설치한 겁니다.”

    부엉이 영감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영감님과 사무실에 돌아온 비버가 따뜻한 차를 준비해서 자리에 앉습니다. 현장에서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던 부엉이 영감님이 입을 엽니다.

    “그동안 숙제를 잘한 것 같네.”

    “영감님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제가 놓치고 있었던 것도 확실히 깨달았고요. 영감님이 그러셨죠, 일보다 일꾼을 먼저 보라고.”

    “그랬지.”

    “저는 공사 현장이 일꾼들보다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을 재건을 위해서 일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일꾼이 없다면, 정확히 말해서 이 마을에 살 동물들이 없다면 마을을 재건할 필요도 없잖아요. 일꾼들이 현장 그 자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죠. 이제야 깨달았으니 감독 자격이 없어도 한참 없었죠.”

    너털웃음을 웃는 비버를 보며 부엉이 영감님이 윗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비버의 손에 쥐여줍니다. 한 달 전 부엉이 영감님이 가져간 완장입니다.

    “남은 공사도 잘 부탁하네, 비버 감독.”

    비버는 담담하게 완장을 차며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비버 감독의 완장이 오늘따라 더 멋져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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