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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기회 上

2020.1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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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어느 날, 참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주위를 살피다가 탐스럽게 익은 포도를 발견하고 곧장 날아갑니다.

    “훠이, 훠어이!”

    갑자기 날아든 막대기에 놀란 참새가 푸드덕 날아오릅니다.

    “이놈의 참새들 진짜. 후…, 짜증 나!”

    레테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댑니다. 아침부터 쉬지도 못하다 이제 겨우 숨을 돌리려던 참에 참새가 휴식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포도꽃이 피는 6월은 농부가 가장 바쁜 시기입니다.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한 해 포도 수확량이 달라집니다. 꼬륵 꼬르륵. 레테의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립니다. 레테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납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지만 허기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농가의 일을 도울 때도 식사 시간은 꼭 지켰는데, 자신의 농사를 시작하고부터는 제때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손으로 꼽을 만큼 적습니다.

    “나오, 점심시간이야!”

    레테가 포도원을 향해 소리칩니다.

    “너 먼저 가! 나는 하던 거 끝내고 갈게!”

    잠깐의 정적을 깨뜨리는 나오의 목소리가 포도원 깊숙한 곳에서 들리자 레테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쉽니다. 말이 잠깐이지 오늘도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나올 게 뻔했으니까요.

    레테와 나오는 산트렐라성의 성민입니다. 어릴 적 성에 돌았던 전염병으로 둘은 부모님을 비슷한 시기에 잃었습니다. 성민들의 따듯한 보살핌 속에 자란 레테와 나오는 이제 며칠 후면 성인이 됩니다. 아직 자기 땅이 없는 탓에 산트렐라성을 다스리는 성주인 마빅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품삯을 받아 생활합니다. 산트렐라 성민들은 포도를 매년 왕께 진상하는데 농부라면 누구나 질 좋은 포도를 얻기 위해 밤낮 고심합니다. 레테는 그해 농사에 따라 울고 웃는 사람들을 보며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내 땅은 없지만 농사에 책임 없는 내 처지가 훨씬 나아.”

    하지만 나오는 아닙니다. 소출로 고민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 땅에서 자신이 직접 기른 포도를 따보고 싶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둘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른 농가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할당된 땅에서 포도 농사를 짓게 된 겁니다. 그들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 온 것은 석 달 전 산트렐라 성주인 마빅의 초대를 받던 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
    레테와 나오는 마빅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환한 미소로 둘을 맞이한 마빅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숯덩이가 온기를 내뿜는 벽난로 앞으로 그들을 안내합니다. 마빅이 예쁜 꽃그림이 그려진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었지? 축하한다. 이제 자기 일을 스스로 책임질 나이가 됐구나.”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빅은 호탕하게 웃습니다.

    “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말거라. 내가 너희를 부른 건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란다. 너희 장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장래… 요?”

    레테와 나오가 한목소리로 묻습니다.

    “그래, 너희 장래! 사실은 오늘 낮에 왕궁에서 나에게 작위를 하사하겠다는 서찰이 왔단다. 이 일로 몇 달간 왕궁에 다녀와야 해서 성을 비워야 할 것 같구나. 물론 포도 수확 전에는 돌아오겠지만 말이야.”

    “네, 정말 축하드립니다. 성주님! 그런데 성주님께서 성을 비우는 것과 저희 장래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레테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습니다.

    “음, 내가 성을 비우는 동안 우리 집안의 포도원 농사 일부를 너희가 맡아주었으면 한단다.”

    레테와 나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포도원 농사를 맡는다는 것은 지금껏 그들이 해온 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수확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 그것은 일꾼이 아닌 땅 주인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인자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마빅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갑니다. 레테와 나오도 마빅의 뒤를 따릅니다. 성 밖에 위치한 포도원이 커다란 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옵니다. 마빅은 손을 들어 노을로 붉게 물든 지평선 쪽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저기, 백향목 숲 끝자락에 있는 포도밭이 보이니? 몇 해 전 포도 묘목을 심은 곳이란다. 저기 농사를 너희에게 부탁하고 싶구나. 너희 둘이서 저기 포도원 농사를 책임지는 거지. 내가 돌아왔을 때 너희가 재배한 포도 중 극상품이 있다면 왕께 진상할 것이다. 그리고 상으로 너희에게는 저 포도원을 주마.”

    나오의 눈이 반짝입니다. 레테도 머리를 세게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제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가 되었으니 성주로서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야.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단다. 부디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나오와 레테는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마빅은 빙그레 웃으며 둘을 바라봅니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레테와 나오는 포도밭으로 달려갑니다. 성주님이 말한 포도밭은 지력이 좋고 햇볕이 잘 들었습니다. 제법 실하게 자란 포도 묘목을 바라보는 나오의 가슴이 설렙니다.

    “레테, 우리 열심히 하자.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한껏 들뜬 목소리로 나오가 레테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하자 얼떨결에 레테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레테는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시키는 일도 늘 대충대충 해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다가왔습니다. 며칠 전 내린 봄비 덕분에 묘목들은 하루가 다르게 보송보송 새순을 냅니다. 길게 자란 덩굴은 방향을 잡아서 묶어주고, 뿌리가 들리지 않게 흙을 다져주는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유월에 접어들면서 거의 한 달째 비가 내리지 않아 나오와 레테는 포도원에서 멀리 떨어진 저수지까지 물을 길으러 가야 했습니다. 아직 여름은 멀었지만 뜨거운 정오의 햇살은 나오와 레테를 지치게 만듭니다. 포도가 단맛이 들기 시작하면서 포도를 노리는 얄미운 참새까지 쫓아내야 했기에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습니다.

    “아이고!”

    밭에 물 주기를 끝낸 레테가 앓는 소리를 냅니다. 한낮이 되기 전에 끝내려고 서둘렀는데도 해가 벌써 중천에 떴습니다. 며칠째 쉬지도 못하고 포도원 일을 강행한 탓에 레테는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밥을 굶었더니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립니다. 레테보다 물 주기를 먼저 끝낸 나오는 포도 덩굴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포도 농사를 시작한 지 벌써 석 달이 지났지만 레테는 여전히 포도원 일이 손에 익지 않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으로 오늘 아침에도 눈을 떴으니까요. 그때 포도를 향해 날아드는 참새가 레테의 시야에 들어옵니다.

    “훠이, 훠어이!”

    레테는 옆에 있던 긴 막대를 휘두르며 참새를 쫓아냅니다. 놀란 참새가 푸드덕 날아오르며 달아납니다. 이젠 정말 움직일 힘도 없습니다.

    “이놈의 참새들 진짜. 후…. 짜증 나!”

    레테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댑니다. 배꼽시계가 다시 한 번 더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나오! 점심시간이야.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밥은 먹어야지.”

    레테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납니다. 하지만 나오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너 먼저 가! 나는 하던 거 끝내고 갈게!”

    레테가 언짢은 듯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나오는 밭에 거름을 채우고 덩굴을 지탱할 지지대도 더 만듭니다. 이른 아침부터 나오는 레테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지만 전혀 지친 기색이 없습니다.

    “너 이렇게 일하다가 병나. 남은 건 밥 먹고 해도 되잖아. 아니면 내일 하든가! 시간도 많은데….”

    레테가 나오에게 다가서며 투덜거립니다. 인기척을 느낀 나오는 그제야 하던 일을 멈추고 레테를 돌아봅니다.

    “아니, 안 돼. 새순 따고 덩굴 정리하는 건 오늘 끝내야 해. 내일부터 포도 알 솎는 작업에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나오의 단호한 대답에 레테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터뜨립니다.

    “나오, 그건 우리끼리 정한 거잖아. 하루 정도 늦으면 어때.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레테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나오가 움찔 놀랍니다.

    “하지만 오늘 하지 않으면 포도가….”

    “너 설마 우리가 진짜 극상품 포도를 수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나 나나 농사에 완전 초보야. 평생 포도 농사만 지은 농부들도 극상품 포도를 키워내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고!”

    레테는 심사가 틀려 땅을 힘껏 걷어찹니다. 레테를 지켜보던 나오가 말합니다.

    “하지만 미리부터 포기하면 나중엔 정말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돼.”

    당겨진 활시위처럼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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