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입니다. 어릴 적 조그만 동네에서 큰아빠네, 작은아빠네, 거기다 큰이모네 가족까지 이웃으로 살면서 하하호호 도란도란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버스기사였는데 흙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다가도 아버지가 오실 때쯤이면 언니 손을 잡고 아버지 오시는 골목으로 나가서 늘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가족 모임에서 큰아버지를 만나면 웃으며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이 펑펑 내려 쌓였는데도 소연이가 맨발로 골목길에 나와 서 있던 거 생각난다. 아이구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발 어는지도 모르고 그러고 있어가 바로 안고 들어갔다.”
제가 그렇게 기다린 이유는 아버지가 항상 귀갓길에 자식들 주시려고 노란 종이봉투에 젤리를 한가득 사 오셨기 때문입니다. 철이 없던 자녀들은 아버지의 수고와 힘듦보다 손에 들린 노란 봉투 속 젤리에만 관심이 있었지요.
시간이 흘러 한동네에 살던 친척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저희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IMF 외환위기로 생활이 많이 어려워지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이일 저일 하느라 바쁜 부모님과 대화할 시간이 줄었고 제가 사춘기가 오면서 아버지와의 사이는 데면데면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도 있었고, 표현에 어색해하던 분이라 마음과 다르게 더 엄격하게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아버지는 내가 싫은 거야. 내가 미운 거야. 내 마음도 모르고’라는 생각에 아버지와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어느덧 저는 두 딸의 엄마가 되었고, 하루하루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로부터 “손녀 보고 싶다. 장날이기도 하고 겸사겸사 버스 타고 가고 있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부모님 댁에서 저희 집까지 버스로 한 시간. 먼 거리를 오시기에 시장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도착할 때쯤 첫째 딸도 하교해서 다 같이 붕어빵 가게로 향했습니다. 붕어빵 가게에 도착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아버지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많이 친절하시네’라고만 생각했지요. 아버지가 “손녀 좋아하는 붕어빵으로 가득가득 담아주이소”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노란 봉투에 붕어빵을 한가득 담아주었습니다. 봉투를 받아 들고 뒤돌아서는데 아주머니가 저를 불렀습니다.
“새댁, 혹시 할아버지 딸이야?”
“네, 제가 딸이에요. 왜요?”
“아이고, 새댁이 딸이구나. 저 할아버지, 장날만 되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이 붕어빵 가게에 와서 손녀 기다리잖아. 손녀가 붕어빵 좋아해서 사준다고. 그러니 새댁, 아빠한테 잘해!”
아주머니의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쿵’ 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장날마다 버스를 타고 오셔서 붕어빵 가게에서 손녀를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오면 손녀를 만나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라며 붕어빵을 사주고 곧바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셨고요.
그 말을 듣고, 앞에서 손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버지의 처진 어깨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꾹꾹 참았다가 결국 집에 와서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으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서운함이 산산이 부서지고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자식을 향한 사랑이 지극했던 분이셨습니다.
부모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그 묵묵한 사랑을 조금씩 깨닫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노란 종이봉투에 담긴 아버지의 크신 사랑은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음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