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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남편의 감사 일기장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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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 전에는 무뚝뚝한 남편이 참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대학교 선배였던 남편은 군대 제대 후 복학했고 나와 같은 학년을 다니다가 같이 졸업했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먹고 싶은 건 없느냐, 갖고 싶은 건 없느냐, 가고 싶은 데는 없느냐”라는 말들이 최대치의 애정 표현이었다. 그때 많은 걸 좀 요구할 것을, 순진했던 나는 ‘없다’는 말로 일관했었다.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듣고 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딸아이가 태어난 후 괜스레 그 말이 듣고 싶어졌다. 글쎄, 남편이 딸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이다. 딸아이가 먹고 싶다는 것은 한밤중에도 사 오고, 둘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거나 팔짱을 끼고 가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면서도 나에게는 왜 그런 표현을 안 하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남편에게 팔짱이라도 낄라치면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팔을 빼고 느닷없이 안 하던 스트레칭을 하며 나와 거리를 두는 것에 심술이 났다. 한마디로 남편은 쑥스러움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내가 길에서 팔짱을 끼면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하고 말하거나, 한겨울인데도 “날씨가 더운데 우리 붙지 말자”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 딸아이와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다. 딸아이는 그 모습이 재밌는지 나를 약 올리며 아빠에게 더 착 달라붙는다.

    얼마 전 딸아이가 친구들을 우르르 집에 데리고 와 놀았다. 아이들의 시끌시끌한 웃음소리를 피해서 나는 남편의 서재로 숨어들었다. 다이어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교회 월간지에 내 원고가 채택되어 선물로 받은 다이어리였다. 욕심이 별로 없는 남편이지만 그 다이어리는 낚아채 갔다. 다이어리가 많이 부풀어 보였다. 그건 종이에 글씨를 꾹꾹 눌러쓰면 발생하는 현상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남편이 본인만의 리스트에 그날그날 할 일을 체크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뭘 적어놨길래 다이어리가 이렇게 부풀어 오른 거지?’

    호기심에 다이어리를 펼쳤다. 남편은 다이어리를 감사 일기장으로 쓰고 있었다. 감사 일기장도 어쨌든 엄연한 일기장이었으므로 다이어리를 덮으려는 순간에 딸아이 이름과 내 이름이 보였다.

    -현임이랑 하경이가 화해해서 감사합니다.

    딸아이와 내가 다툰 날이었나 보다.

    남편은 하루에 다섯 가지 이상은 꼭 감사할 거리를 적고 있었다. 보통 첫 번째로 적는 내용이 있었다.

    -쉴 수 있는 집이 있어 감사합니다.

    예배가 있는 날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규례를 지킬 수 있어 감사합니다.

    딸아이와의 추억도 감사 일기장에 가득 적혀 있었다.

    -하경이에게 선물을 사줄 수 있어 감사합니다.

    -하경이와 외식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경이에게 용돈을 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남편의 감사 일기장에서 내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현임이가 위로를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위로를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내가 위로받은 게 감사했나 보다. 남편의 감사 일기장에서 내 이름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는 게 느껴졌고 급기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현임이가 아프지만 씩씩해서 감사합니다.

    -현임이가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내가 퇴원한 날의 감사였을 것이다.

    -현임이에게 돈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남편은 월급날에 자신의 수고로 얻은 돈을 나에게 보내며 감사하고 있었다. 매번 월급날 때마다. 내가 친정을 방문하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타지에 갔다 올 때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현임이가 무사히 집에 돌아와서 감사합니다.

    무뚝뚝해서 내가 어딜 가도 나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 남편이었는데 속으로는 내가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나를 염려하는 마음이 감사 일기장을 통해 들키고 말았다. 감사 일기장에는 남편의 진심이 물씬 담겨 있었다. 거의 매일 적혀 있는 ‘쉴 수 있는 집이 있어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을 읽으며 남편이 고된 일을 하며 얼마나 쉬고 싶어 하는지 느껴졌다. 정말 힘든 날이었는지는 몰라도 첫 글자만 써놓은 날도 있었다. 뭘 적으려 했는지는 반복된 패턴으로 알 수 있었다. ‘쉴’은 쉴 수 있는 집이 있어서 감사, ‘규’는 규례를 지킬 수 있어 감사하다는 뜻이었다. 하루하루를 힘들고 바쁘게 지내면서도 매일같이 적혀 있는 감사 문구가 나를 또 울렸다.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가족일 것이다. 남편의 감사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데 나도 주체할 수 없는 감사가 쏟아져 나왔다. 더운 한여름에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하는 것이 힘에 부치지만 하루 종일 고생하고 돌아온 남편을 위해 밥을 차리는 게 감사하다. 투박한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끓여주어도 “엄마, 식당 차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며 딸아이가 맛있게 먹어줘서 그게 또 그렇게 감사하다.

    이런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천국 가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전도와 규례 지키시기를 병행하시고, 석수 일 하시며 진리책자를 남겨주신 하늘 아버지를 영접하고 감사드릴 수 있어 감사하다.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고생만 하신 그 삶, 잠 못 주무시며 더위와 추위를 견디시고 금식기도로 주리시면서도 하늘 어머니와 하늘 자녀들을 생각하셨을 아버지 안상홍님께 감사할 수 있어 감사하다.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천국 가족들 품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어 감사하다.

    남편의 감사 일기장에는 자신을 위한 내용이 없었다. 가족이 행복한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인가 보다. 무뚝뚝한 남편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랑한다는 표현 없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오늘도 나는 우리 집을 가족들이 마음 편히 푹 쉴 수 있는 곳이 되게 하고, 가족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식사를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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