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아빠에게 받은 편지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해 왔습니다. 제 결혼식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신 아빠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제 손에 환전한 달러와 함께 편지를 쥐여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꾹꾹 눌러쓴 편지에는 저를 향한 아빠의 사랑과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어디 멀리 가버리는 것도 아닌데 아빠는 제가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 시댁에서 사랑받을 수 있을지 많이 걱정되셨나 봅니다.
“너를 보내는 허전한 이 심정은 마치 온실에서 자라던 연약한 화분을 문밖에 내어놓고 심한 바람이 불어 쓰러지지나 않을까, 햇볕이 내리쬐어 시들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심정과 다를 바가 없구나.”
그때는 단순히 이 문장을, 귀하게 키우던 딸을 시집보내려니 염려된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저도 자식을 키우면서 문자로는 다 표현치 못한 아빠의 심정이 조금씩 헤아려졌습니다. 얼마 전, 딸이 평소와 달리 연락이 안 되고 새벽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딸이 다 큰 성인이라도 워낙 험한 세상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저는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다행히 딸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사이 제 마음은 타들어 가는 듯했습니다. 온실 속에서 키우던 화분을 밖에 내놓은 것 같다던 아빠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아빠는 키가 작고 왜소한 편이지만 속은 단단한 분이셨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애정을 표현하셨지요. 엄마에게 듣기로는, 첫아이인 저를 어찌나 애지중지했는지 아기 때는 땅에 내려놓지도 못하게 하셨답니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 제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허약했던 탓에 더욱 귀하게 키우셨습니다. 당시 부모님 등에 업혀 병원에 다녔던 일 외에 다른 기억은 별로 없지만, 아빠가 시계를 가져다가 바늘을 돌려가며 시계 보는 법을 알려주셨던 일, 저를 레스토랑에 데려가 양식을 사 먹이고 립밤을 선물로 주셨던 일 등 아빠와의 추억이 마음 한편에 따듯하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아빠는 묵묵히 저를 챙겨주셨습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신혼집에 갔을 때는 제가 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것들이 세심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주방에는 소금, 설탕, 후추 등 이름이 붙은 양념통 하나하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방마다 휴지통이 비치돼 있는 등 구석구석 아빠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면 손주들을 예뻐하시는 아빠를 보면서 내가 어렸을 때도 저렇게 예뻐하셨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빠는 항상 손주들과 약수터 같은 데로 산책을 나가곤 하셨습니다. 애 키우느라 고생한 딸을 쉬게 하려는 아빠 나름의 행동이었겠지요.
언젠가 아빠에게 가죽으로 된 휴대폰 커버를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비싼 제품도 아니었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딸이 줬다고 자랑을 많이 하셨다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아빠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받았지만 나는 정말 해드린 게 너무 없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빠가 가족들 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흘렀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땐 나를 지켜주던 산 하나가 없어진 듯했습니다. 아빠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아직도 어딘가에 쓰여 있는 아빠 이름 석 자만 봐도, 아빠가 남겨 놓은 필체만 봐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곁에 계실 때는 미처 다 깨닫지 못했던 아빠의 사랑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그 사랑을 왜 뒤늦게야 알게 된 걸까요. 지금 아빠가 곁에 계신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드리고 꼬옥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아빠처럼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여전히 아빠의 사랑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빠에게 사랑받았기에 제 아이들을 더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아빠는 새해가 되면 달력과 노트를 준비해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일이나 중요한 일, 기억해야 할 일을 일일이 적어놓으셨는데 저도 그대로 본받아 항상 노트에 가족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딸이 결혼하는 날이 오면 저도 아빠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렵니다. 그때는 아빠의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립고 보고픈 아빠, 아빠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진심, 아버지를 읽다’展 3관 “….”>
“사랑하는 딸에게” 원문
상희야
신혼 여행은 즐거웠겠지.
두 사람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벌써 네가 한 가정의 주부로써 아빠, 엄마의 품을 떠나 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자랑스럽기만 하구나.
그러나 너를 보내는 허전한 이 심정은 마치 온실에서 자라든 연약한 화분을 문밖에 내어놓고 심한 바람이 불어 쓰러지지나 않을까 햇빛이 내려쪼여 시들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심정과 다를 바가 없구나. 상희야 이제 여러 사람들이 불러주든 상희네 집, 상희 엄마, 상희 아빠란 말도 들어볼 수 없겠지. 옛말에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만 집을 나가도 온 집안이 허전하다는 말이 정말 이런 때 심적으로 가슴속 깊이 느켜지는 것을 말한 것 같구나. 상희야 엄마, 아빠가 신혼생활에 기본적인 생활용품만을 간소하게 성심컷 준비하여 보았다만 마음만 분주했을 뿐 너무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구나. 더 좋은 물품과 더 많은 용품이 필요하겠지만 살아가면서 조금씩 준비하도록 하여라. 이제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모쪼록 심을 합하여 서로 돕고 의지하며 인내와 이해로 평온한 가정과 건강한 생활로 평생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기 바라며, 시댁의 여러 친척과 시부모님으로부터 사랑과 인정 속에 존경받는 꼭 필요한 새 가족이 되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