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저희 집은 19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습니다. 그만큼 집터가 넓어 추억도 많습니다. 마당 한편 작은 비닐하우스에는 각종 식물을, 우물 옆에는 닭, 오리, 토끼를 길렀고 대문 어귀부터 둘러진 과수들에서 철마다 석류, 앵두, 보리수, 단감, 살구, 알밤 등을 따 먹으며 자랐습니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아주 오래된 정자나무와 방죽 둑으로 둘러막은 못이 반겼습니다. 시내는 굽이굽이 이어져 저수지까지 흘러들어 갔습니다. 동네 앞동산과 뒷동산은 제 놀이터였습니다. 뒷길로 쭉 걸어가면 산이 나오는데 그 절벽 밑 방죽 옆에 앉아 이런저런 고민을 털곤 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면서 고향 마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아이가 잠들기 전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속 배경으로 불러왔습니다. 엄마의 고향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아이는 그곳에 무척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 핑계로 휴일에 날을 잡고 고향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아이가 건물들이 현대식으로 다 바뀌었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했습니다. 워낙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지라 저도 내심 불안했습니다.
드디어 제가 살던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걱정하던 대로 마을은 변해 있었습니다. 흙과 자갈이 깔려 있던 도로는 아스팔트로 새 단장 했고 옛집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으며 마당의 과일나무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앞동산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가정집, 시멘트로 매끈하게 발린 시냇가는 더 이상 제가 알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절벽 밑 방죽이 그대로여서 그곳에서 잠시 추억에 잠겼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처음 보는 평화로운 풍경에 신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현대식으로 바뀐 동네가 깔끔하고 예뻤지만 옛 모습이 그립기도 하고 달라진 풍경에 서운함마저 느껴졌습니다.
흔히 인생을 시간 여행이라고도 합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 때로 아쉬움이 남지요. 하지만 지난 여정이 남긴 추억들은 우리 마음속에 남아 언제든 꺼내볼 수 있습니다. 한 시인은 세월이 흘러도 추억은 늙지 않기에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말합니다. 변해버린 고향에 제가 실망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하늘 본향은 어떠할까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노라면 저 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옵니다. 저는 왜 우주 별세계를 사모하는 걸까요? 살던 곳이 아니라면 그리워할까요? 고향 동네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이 제게 남아 있기에 이전 모습을 동경하는 것처럼, 비록 죄악의 너울로 인해 전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하늘 본향에 대한 추억이 있으니 그리움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마음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그곳, 너무나도 다시 가고 싶은 그곳, 나도 모르게 진한 향수가 일어나는 그곳. 내 고향 천국입니다. 오늘도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에 대한 그리움을 소환합니다. 영원한 고향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다시 마음껏 뛰어놀 그날을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