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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늦은 고백

2020.0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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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니와 나를 홀로 키워내신 아빠는 우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특히 세 살 터울인 언니보다 나를 더 애지중지하셨다. 둘이 다투면 “언니가 참아야지 동생과 똑같이 싸우느냐”고 언니를 혼내셨다. 언니가 많이 억울했을 것 같지만 당시 나는 언니와 싸우면 그 약점을 이용해서 아빠에게 이르겠다고 협박(?)하며 과자를 얻어내곤 했다.

    아빠는 늘 나를 당신 무릎에 앉히셨고, 들꽃이 피는 계절이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꽃 이름을 알려주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매일 아침 여러 색깔 고무줄로 알록달록하게 머리를 묶어주시고, 내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주셨다. 아빠 손은 참 따뜻했다. 운동회 날에는 아빠가 할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우리 반 응원석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셨다.

    아빠가 내게 유달리 지극했던 이유는 내가 허약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언니에 비해 나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갓난아이 때는 위급 상황이 와서 아빠가 나를 들쳐 업고 응급실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커서는 신장에 문제가 생겨 친척들이 놀랄 정도로 온몸이 퉁퉁 붓기도 했고, 아파서 한 달가량 학교를 결석한 적도 있었다. 나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느라 아빠는 일을 못 나가시는 날이 많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두 딸을 바르게 키우겠다는 아빠의 책임감과 생활력은 정말 대단했다. 몸에 해로운 습관을 다 끊고 오로지 자식을 위한 삶을 사셨다. 건설 현장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새참으로 나오는 빵을 드시지 않고 챙겨와서 우리 손에 쥐여주셨다.

    지금은 가슴에 또렷하게 새겨진 아빠의 사랑을 당시에는 왜 몰랐는지. 사춘기 시절에는 아빠에게 반항을 많이 했고 사회인이 돼서는 내 생각이 옳다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어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결혼 후 두 딸을 낳아 아빠의 사랑을 깨달아갈 즈음 진리를 영접하게 됐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신앙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빠도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언니는 아빠의 단호한 성격으로 볼 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놀라워했다. 앞으로 아빠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할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세월 앞에 몸이 많이 약해진 아빠는 결국 요양 병원에 입원하셨다. 병문안을 가서 아빠의 딱딱하게 굳은 발톱을 깎아드리는데 간병인 아주머니와 다른 환자의 가족이 말씀하셨다.

    “아빠가 딸을 아주 많이 사랑하시나 보네. 표정이 밝아지고 눈빛도 달라졌어. 짠하고 측은하게 바라보시는 것 같네.”

    얼마 뒤 아빠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빠는 겨우 의식만 있는 상태에서 손녀들을 찾으셨다.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며칠 뒤 다시 병원을 찾았다. 아빠는 그리워하던 손녀들이 왔는데도 한참 동안이나 나만 빤히 바라보셨다. 두 눈에 꼭 담아두시려는 듯.

    먹고사는 자체가 쉽지 않던 시절, 동네 어르신들이 언니와 나를 보고 하시던 말씀이 있다.

    “세상 천지에 너희 아빠처럼 자식한테 극진한 사람 없다. 아빠 은공 절대로 잊지 말고 이다음에 크면 꼭 아빠한테 효도해라.”

    마지막까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도 아빠에게 효도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 딸이다. 그야말로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못난 딸을 보살펴준 지극한 사랑을 헤아려보며, 이제야 아빠에게 고백한다.

    “아빠, 사랑으로 보살펴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그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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