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시온 한편에 노란색으로 단장한 ‘제20회 멜기세덱문학상 공모’ 포스터가 붙었다. 특별히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맞춤법도 잘 모르지만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아주 강렬하게. 무한한 창의성과 엄청난 인내를 가지고 써야 하는 소설, 귀여운 문체로 읽는 이들의 동심을 일깨우는 동화, 상대의 마음을 설득시키는 논설문까지. 공모 분야도 다양했다. 찬찬히 포스터를 살펴보던 중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수필.’
수필. 수피일. 수우피이일. 갑자기 막막해졌다. 수필은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글로 담을 만한 특별한 경험이 없으니까. 그래서 수필은 아예 생각도 안 하다가 하나님의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소소한 일상이 적힌 수필을 읽으며 잔잔한 위로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득 수필이 쓰고 싶어져 가족과의 경험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아빠와의 기억부터. 나는 기침이 한 달 이상 멈추지 않아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마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아빠. 엄마에게 볼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괜찮은지 궁금해서 전화하신 거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딸을 생각해준 아빠 덕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날 아빠는 미세먼지를 막아준다는 3D 입체 마스크까지 사오셨다. 선물도 좋았지만 아빠의 정성과 관심이 더 좋았다. 우리 가족에게 든든한 사랑을 주시는 아빠가 있어 참 행복하다.
다음으로는 엄마. 쓸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소재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려서 그런가 보다. 엄마는 내 등하교를 책임져주고, 내가 버거워하는 일은 대신 챙겨주고, 놓고 간 물건은 학교로 가져와주고, 힘든 일 있을 때 상담자를 자청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생각나는 대로 다 적었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불현듯 ‘엄마는 언제 엄마를 위한 시간을 보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내가 엄마의 모든 시간을 독차지한 기분이다. 수필을 쓰면서 처음으로 엄마가 안쓰러웠다. 특혜를 계속 누리고 싶지만 많이 약해진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자유를 드려야 할 것 같다. 앞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스스로 해야지. 나를 위해 19년의 시간을 헌정해준 엄마를 위해.
마지막 주인공은 동생! 언젠가 가방을 열다가 옅은 빨간색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겉봉에 쓰인 ‘받아라’ 하는 글자를 보고 동생이 넣은 거라고 짐작했다.
‘안 쓰려고 하다 그냥 써봤어. 편지지가 남길래.’
첫 줄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 했는데 읽을수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평소에 장난치는 건 언니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애교로 봐주라. 집에서는 놀려도 나가면 언니가 나보다 이쁘고 엄청 착하다고 자랑하고 다녀. 바이올린이랑 피아노 연주도 잘하고,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지만 나보다 공부도 잘하는 언니가 자랑스러워.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나도 늙었는지 바이올린 연주하는 언니 보면 눈물이 찔끔 난다. 멋있고 뭐 그렇다고. 거 참 창피하네. 사랑한다고 하기 그렇지만 편지니까 한번 해줄게. 사랑함.’
사실 동생은 외향적이고 나는 내성적이라 인기가 많은 동생이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동생의 편지를 읽고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 같았다. 동생은 내게 힘이 솟게 하는 존재다.
수필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보니 감사한 일이 정말 많았다. 수필을 쓸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에 응답받은 것일까? 그 말도 맞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는 법을 깨우쳐주시려 계기를 만들어주신 듯하다.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마음의 눈에 담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라는 것을, 감동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