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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손바닥에 새긴 이름

2019.0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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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치매 판정을 받은 80대 할머니를 돌보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외출 시 집을 잘 찾아올 수 있도록 할머니께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고, 글자를 잊어버리지 않게 책을 읽어드리라는 것이 제가 부탁받은 일이었습니다. 크게 어렵지 않은 데다 친정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을 뵈면 괜스레 마음이 가 기꺼이 그러기로 했습니다.

    첫날, 인사를 드리고 할머니와 둘이 있는데 할머니가 제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렸더니 내일도 물어보고 그다음 날도 물어보고 매일 계속 물어봐도 대답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네”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자녀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자식 자랑을 하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저에게 당부하시더군요. 나중에 당신이 잊어버리거든 지금 들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요.

    할머니는 누구를 만나든 자식들 이야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기억은 없어질지라도 저처럼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기억하지 않겠느냐면서요. 자식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알고 나니 자식 자랑 같던 이야기가 모두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딸 이야기를 찬찬히 해나가시던 할머니는 저에게 다시 부탁했습니다. 볼펜으로 자신의 손가락마다 자녀들 이름을 하나씩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손가락에 첫째 아들 이름, 두 번째 손가락에 둘째 아들 이름, 세 번째 손가락에 셋째 딸 이름을 적고 손바닥에는 ‘엄마’라고 써달라고 했습니다.

    “할머니,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 이름을 쓰셔야 나중에 할머니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시겠어요?”

    제 말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나는 우리 애들 이름만 기억하면 돼. 내가 우리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딸 이름 안 까먹으려고 손가락에다 일일이 써놨는데 손바닥에 내 이름을 써놓고 그것만 생각나면 손가락에 써 있는 이름이 누군지 모를 거 아냐? 엄마라고 써놔야 ‘아, 내가 이 이름들 엄마구나’ 하고 생각날 것 같아.”

    손가락 하나하나를 펼치며 자녀들의 이름을 곱씹어 부르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손바닥에 자녀들의 이름을 새기고 자신의 이름보다 엄마라는 이름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바로 우리 하늘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한 자녀 한 자녀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기나긴 시간 손바닥에 제 이름을 새기시고 애절하게 부르시는 하늘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 그 어떤 이름보다 위대하고 빛나는 이름, ‘어머니’. 애타는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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