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도 힘들 때가 있지. 하다가 힘들면 아부지한테 와. 느그들 먹고살 만큼은 준비해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겄지?”
가끔씩 찾아뵐 때면 시아버지께서 우리 부부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이 가정을 꾸리고 본인들의 능력과 힘으로 살고 있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이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던 분이셨습니다. 그러셨던 아버님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3년 전 설 연휴에 아버님을 만난 곳은 중환자실이었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뇌 손상으로 인해 언어 장애가 생기고 몸의 오른쪽에 반마비가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늘 건강하고 유쾌하셨던 분, 자식들 앞에서 특히 며느리인 제 앞에서는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분이 온갖 튜브를 몸에 꽂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니 말문이 막혔습니다.
아버님의 의식이 돌아올 즈음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드렸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던 아버님은 갑자기 제 손을 꼭 쥐더니 뭔가를 말씀하시려고 했습니다. 언어 장애가 온 직후이고, 산소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애타는 아버님의 표정과 눈빛을 보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결혼 10주년이라 설 연휴를 이용해 남편, 아이와 함께 가까운 외국에 다녀오려고 했습니다. 가족 여행은 처음인지라 모두 들떠 있었고 기대도 컸습니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 아버님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고, 당연히 가족 여행은 취소됐습니다.
쓰러지기 이틀 전, 아버님이 저희 집으로 찾아와 잘 다녀오라며 용돈도 주고 가셨던 터라 그 여행에 대해 물어보시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손을 꼭 잡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 여행은 다음에 가요. 아버님 다 회복하시면 그때 우리 다 같이 가요.”
제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님은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그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파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아버님 눈물의 의미를 너무 잘 알기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아들 가족의 설렘 가득한 계획이 무너졌다는 죄책감. 자식들의 앞날에 도움은커녕 장애물이 되었다는 현실. 당신의 몸 상태가 어떻든지 우리의 여행을 먼저 걱정하신 아버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옵니다.
현재 아버님은 열심히 재활 치료와 운동을 해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비슷한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분들 중 아버님의 회복 속도는 월등했습니다. 재활에 대한 의지가 워낙 강하셔서 비록 예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많이 건강해지셨습니다. 저는 압니다. 그것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임을.
바꾸거나 어길 수 없는 중요한 법칙. 철칙(鐵則)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철칙은 자녀의 행복이라는 것을 시아버님을 보며 다시금 확인합니다.
하늘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기나긴 세월, 자녀들의 행복을 당신의 철칙으로 여기시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아버지. 아버지의 철칙으로 얻게 된 이 행복과 구원을 소중히 가슴에 새기고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파하는 자녀가 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