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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가장 어려울 때 탄생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

2021.08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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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배’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유배형(刑)이라 하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중죄인이 생각납니다. 이미 없어진 과거의 형벌임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유배는,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내는 형입니다.

    유배형은 왕에게 반역하거나 국가를 전복하려는 사건에 관련되는 중죄인부터 불효, 직무 태만, 폭행 등의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 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시행됐습니다. ‘절도안치(絶島安置)’는 섬으로 보내 주위와 단절시키는 가장 가혹한 형태의 유배였습니다. 제주도, 진도, 남해, 거제도 등의 섬이 대표적인 유배지였고 그중에서도 조정에서 멀면서 육지와의 교류가 상당히 어려웠던 제주에는 역모와 연루된 중죄인들이 보내졌습니다. 고향을 떠나 고립된 지역에서 유배 생활 하는 죄인들은 생활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유배형을 받은 죄인들의 삶은 그들이 남긴 여러 문서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배 내내 원망과 한탄으로 일관하며 결국 자기 멸시와 자기 파괴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암울한 현실을 오히려 새 출발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덕을 반성하고 죄를 참회하며, 자기 성찰을 통해 미래를 모색하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려 애썼습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바로 ‘유배 문학’입니다. 유배 문학이란 말 그대로 유배지에서 탄생한 문학으로, 유배 중이던 이들이 고독을 벗 삼아 인내하고 노력한 끝에 나라와 백성에 유익한 저서를 다수 남긴 것입니다. 어쩌면 삶의 의미를 놓아버릴 수도 있는 유배지에서 가치 있는 예술품을 완성하고 심오한 학문의 집대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요. 말하자면, 이들에게 유배라는 형벌은 곧 자신을 회고(回顧)하는 기회였으며, 유배지는 정신 세계를 가다듬는 수련의 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허준은 유배지에서 『동의보감』의 저술 작업을 이어갔으며,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와 같은 예술 작품을 빚어냈고,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고,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저술했습니다. 서양 학문에 심취했던 정약용의 경우 18년이라는 오랜 유배 생활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갔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가족,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었을 테지만 다른 유배지에 있는 형제들이나 사랑하는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학문에 매진해 『여유당전서』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우리는 천상에서 지은 반역죄로 하늘 본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구 땅으로 유배를 온 죄인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누군가는 이 삶에 좌절하며 원망과 불평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가치 있는 일로 시간을 채우며 자신만의 ‘유배 문학’을 만들어갑니다.

    후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유배지에서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믿음과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갖춰야 한다고 알려줍니다(벧후 1장 4~11절). 정약용이 유배지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정신을 수양하고, 가족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하며 저술 활동에 힘썼던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온전한 회개로써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하며 덕을 세우고, 누가 보지 않더라도 절제하는 경건한 삶을 살고, 형제자매 사랑을 실천하고, 성경 말씀을 상고하며 진리를 전파하는 전도자의 본분을 다한다면 영적 유배지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결실을 남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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