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아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이삿짐 트럭에 몸을 실었다. 한참 덜컹거리며 달리던 트럭이 멈춘 곳은 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해안가 마을이었다. 난생처음 바다를 본 언니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바닷가로 달려갔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 바다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갈매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바람….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좋았던 바다가 싫어지기 시작한 것은 엄마가 바지락을 캐면서부터였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하루 두 번 바지락 양식장에 가서 바지락을 캤다. 캐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바지락을 집에 가져와 일일이 깠다. 엄마가 캐오는 바지락 양이 점점 많아져서 언니와 나도 어쩔 수 없이 바지락 까는 것을 도와야 했다. 다 깠다 싶으면 또 가지고 오는 엄마가 밉기까지 했다. 심지어 일요일에도 동네 이장님 집 마당에 모여 바지락을 깠다. 나는 바지락을 까야 하는 여름이 싫었고 나중에는 바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후 엄마와 바지락을 캐러 갔다. 까는 것보다 캐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해 따라나섰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바지락을 캐는 곳까지 족히 3킬로미터를 걸었다. 갯벌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도착하기 전부터 기진맥진했다. 엄마는 바닷물이 허벅지 높이에서 찰랑거리는 지점까지 가서야 멈췄다. 삼태기를 물속에 집어넣고 허리를 굽혀 호미로 펄을 힘껏 긁어 올린 후 바닷물에 씻어내면 하얀 바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지락으로 가득 채운 삼태기를 머리에 인 채 돌아오는데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삼태기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마루에 드러눕고 말았다.
바지락을 까는 우리의 수고는 그야말로 미미한 것이었다.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장성한 자녀가 되는 첫걸음은 부모님의 희생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엄마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의젓한 딸이 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