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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경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갱년기 증상이라고 가볍게 넘기다가도 이 정도면 심각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억력이 안 좋아졌습니다. 사람이나 물건의 이름뿐 아니라 하루 전에 뭘 먹었는지,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아예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습니다. 장을 보러 마트에 갈 때는 미리 메모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사야할 물건을 한두 개는 빼놓고 옵니다. 좀 걱정이 돼서 제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자료를 살피다가 ‘과잉 기억 증후군’이라는 장애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과잉 기억 증후군은 마치 녹화된 영상을 보는 것처럼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증상입니다. 2006년 미국의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이 최초로 이 진단을 받았는데, 그녀는 14세 때부터 살아온 모든 날을 기억했습니다. 어떤 날짜를 말해도 그날 있었던 일들과 날씨, 옷차림, 그 당시 느꼈던 감정까지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100여 명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데, 발병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이 특별한 것은 일반인은 과거 기억을 뇌의 우측 전두엽에 저장하는데 반해 이들은 우측과 좌측 전두엽 모두에 저장한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모든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아도, 정작 당사자는 떨치고 싶은 것까지 다 기억하고 심지어 슬픔, 좌절, 분노, 고통 등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나 힘들다고 합니다.
질 프라이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잊고 싶은 기억까지도 기억하는 고통이 너무 크다’고 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좋은 선물이 ‘망각’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했을 때는 천사 세계에 대한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하늘에서 큰 죄를 짓고 이 땅에 쫓겨난 존재임을 알게 되니 그저 천상의 기억을 지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때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시도 맘 편히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하시면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까지 오셨습니다. 천상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당신 앞에 나아온 철부지 자녀들을,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