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기척에 창문을 연다. 눈이 내린다. 하얗게 덮이고 덮이는 것은 세상이 아니고 마음인 듯 시야가 맑아지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눈 오는 날에는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외갓집은 바다가 있는 울진이다. 겨울에 가면 눈이 펑펑 쏟아지고는 했다. 유난히 조용한 겨울밤에는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종일 짖어대던 강아지는 잠들고, 휘몰아치던 바람은 동네 어귀 고목나무 가지에 걸렸는지 잠잠했다. 하얗게 변한 산과 들이 신비로웠다. 이러다 온 세상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엉뚱한 걱정도 했다. 날이 밝으면 마당에서 쌀 베자루, 박스를 주워 외갓집 바로 옆에 있는 비탈길로 나갔다. 굳이 돈 들여 눈썰매장을 가지 않아도 됐다. 순서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항상 1등으로 베자루 썰매를 탔다. 눈 하나 내렸을 뿐인데 뭐가 그리 좋았는지 오르락내리락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외갓집에서만이었을까, 눈이 오면 무조건 밖으로 뛰쳐나갔다.
“엄마! 친구랑 놀다 올게!”
“잠깐 이리 와 봐.”
“빨리 나가야 돼!”
“여기 스키 장갑 끼고, 신발도 운동화 안 돼. 부츠 신자.”
“아, 알았어! 빨리빨리!”
스키 장갑을 끼면 눈이 잘 잡히지 않았다. 눈사람을 예쁘고 크게 만들고 싶던 나는 금방 스키 장갑을 벗어버렸다. 눈놀이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손이 얼어서 빨갛게 퉁퉁 부었다. 엄마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욕조에 따뜻한 물을 담아놓고 나를 기다렸다. 몸은 추워도 마음은 포근했다. 그런 날은 눈처럼 하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꿈을 꿨다.
할머니 댁에 안 간 지 수년째다. 눈놀이를 멈춘 지도 그만큼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 오는 날이면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꿈의 나래를 편다. 눈송이가 되어 날아보고, 날다 지치면 나뭇가지에 앉아 쉬었다가 또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순수한 꿈들이 내 마음속 세상에 소복소복 눈처럼 쌓인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눈처럼 아름답고 포근한 존재가 있다. 답답한 시간을 자유로운 시간으로 바꾸어주고, 힘겹고 풀리지 않는 나의 속마음을 다 헤아려준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까지 선물로 주신다.
눈 오는 날, 나는 꿈꾼다. 언젠가 하나님의 손을 꼭 잡고 신비로운 우주 속을 마음껏 날아다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