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창고 구석에서 낡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먼지를 털고 뚜껑을 열자 앨범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빛바랜 주홍색 앨범을 펼쳤습니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앨범을 넘기다가 잉크가 짙게 번진 편지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30년 전, 아버지가 제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동안 잘 지냈니?
네가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조석으로 바람이 찬 걸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싶다. 우리 딸, 일하면서 학교 다니느라 많이 힘들지? 못난 아비 만나서 네가 고생이 많구나. 정말 미안하다.
휴가 때 보니 얼굴이 너무 야위어서 마음이 아팠단다. 끼니 잘 챙기고 추석 때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구나.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지금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훗날 네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아버지는 우리 딸이 잘해낼 거라 믿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저는 도시로 나가 산업체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편지에는 객지 생활 중인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제 고향은 강원도 양양입니다. 읍내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에 아침저녁 두 번밖에 오지 않는 첩첩산중이었습니다. 덕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구불구불한 비포장 산길을 지나 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한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전기, 수도는 꿈도 꿀 수 없었고 감자밥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는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아버지는 교육 열의가 강했습니다.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한다. 가난할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며 바쁜 중에도 틈틈이 육 남매의 공부를 봐주셨지요.
부모님은 벼농사를 지으며, 산비탈을 개간해 감자를 심었습니다. 양봉도 하고 가을에는 송이도 채취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서면 깊은 밤, 달과 별을 벗 삼아 귀가하셨습니다. 6.25 전쟁 당시 한쪽 다리를 다쳐서 인공관절을 삽입하셨는데, 불편한 다리로 온종일 고되게 일을 한 날에는 엄습해오는 통증으로 쉬 잠들지 못하셨습니다. 가끔 작은 손으로 다리를 주물러드리면 “아이고, 시원하다” 하시던 아버지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아버지께도 취미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낚시입니다. 아버지가 낚시 도구를 챙기면 저도 아버지를 따라나섰습니다. 아버지와 강둑길을 걸으며 해당화 열매와 산딸기를 따 먹던 일은 정겨운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여름휴가를 나왔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그날도 낚싯대를 멘 아버지를 따라갔습니다. 나란히 강둑길을 걷던 아버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더니 “아빠가 이제까지 한 번도 용돈을 준 적이 없구나” 하시며 제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시고 앞서 걸어가셨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모든 것을 내어주었기에 당신 주머니는 항상 텅 비어 있었음을 저도 알았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거대한 산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그날 아버지의 뒷모습은 한없이 작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말없이 강을 응시하던 아버지의 마음을 제가 부모가 되고서야 헤아려봅니다. 그 시간만큼은 고단한 삶의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었을 테지요. 육 남매가 제 앞가림을 할 즈음, 아버지는 간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고목나무-아버지 입원 병실에서
햇살은 창을 뚫고 하얀 시트 위 휘어진 잔등에 머문다.
병실에 누운 아버지는 잠자리 날개 같은 몸으로 영의 세계를 오가는지!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셔 창을 보니 고목나무 한 그루 외로이 서 있다.
그 오랜 세월 한자리에 서서 인생의 생사를 관망하던 노목.
시야를 휘젓는 햇살에 검게 그을린 눈을 애써 뜨며 당신을 바라본다.
흰 눈이 날리던 초겨울, 아버지는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커졌습니다. 아버지와 단풍이 물든 한계령을 넘었던 일과 맑은 계곡을 거닐었던 추억, 푸른 초원이 펼쳐진 들길을 함께 걸었던 시간이 고스란히 꿈에 나타났습니다. 자녀들의 행복만을 위해 살다 가신 아버지께 오랜만에 안부를 여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