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가을날, 딸아이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하기 딱 좋은 쾌청한 날이었다. 회사에 연차를 낸 터라 아침 일찍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며 운동회에 갈 준비를 했다.
“엄마, 오늘 운동회에 와요?”
“그럼, 우리 딸 초등학교 첫 운동회인데 당연히 가야지.”
하교 시간에 맞춰 엄마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친구들과 달리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 때문에 매번 혼자 하교하던 딸은 엄마가 온다는 사실만으로 한껏 들떴다. 나 역시 오늘만큼은 딸아이를 목청껏 응원하며 평소에 못 했던 엄마 노릇 한번 제대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1학년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운동회를 지켜봤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 할 것 없이 다 와서 통닭도 뜯고 삶은 계란도 까먹고, 김밥도 나눠 먹었는데 요즘 운동회는 오전 반나절이면 다 끝난다고 했다. 뙤약볕에 종일 앉아 있을 필요가 없으니 고맙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섭섭했다.
교장 선생님의 인사 말씀과 일정 소개가 이어지고 본격적으로 운동회가 시작됐다. 학교 다닌 지 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병아리같이 귀여운 1학년 아이들의 달리기가 시작된다는 안내를 듣고 얼른 결승점 근처로 갔다. 이미 많은 학부모들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다들 100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에서 달려오는 아이들 틈에서 자기 자식은 어떻게 알아보고 카메라를 줌인해가며 사진을 찍는지. 그 모습을 여유롭게 바라보다 갑자기 긴장이 되면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딸아이 차례가 온 것이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출발한 딸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4명 중 3등으로 들어왔다.
“이야, 우리 딸 잘 달리네. 엄마가 진짜 열심히 응원했는데 봤어?”
“헉헉, 엄마 말 시키지 마요. 헉헉. 그런데 엄마는 너무 예뻐서 저기서도 보였어요. 얘들아, 헉헉.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 이쁘지? 헉헉.”
엄마가 왔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까. 딸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친구들에게 나를 자랑했다. 왠지 뿌듯했다. 바람까지 기분 좋게 살랑이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잠시 후 학부모님 줄다리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홀수 반 학부모님은 청팀, 짝수 반 학부모님께서는 백팀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아이에게 엄마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 반 친구 엄마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다.
“채은 엄마, 장갑 안 끼고 왔어요? 손 아플 텐데. 나도 장갑을 하나밖에 안 가져왔는데. 우짜지?”
“아, 장갑 있어야 돼요? 안 가져왔는데…. 괜찮아요. 3판 2선승제라고 하니까 금방 끝나겠죠, 뭐.”
우리는 청팀 줄다리기 대열의 중간 부분에 들어갔다. 줄 간격을 체크하던 선생님 한 분이 “아이고, 어머니 장갑 안 가지고 오셨어요? 제 꺼 끼고 하이소” 하며 잠바 호주머니에서 면장갑을 꺼내주었다. 반 대표로 줄다리기에 참가하면서 준비물이나 종목의 특성에 관해 알아보지 않고 그냥 와버렸다.
“어머니는 키가 크시네요. 뒤쪽으로 옮겨보입시더.”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나는 이미 반 친구 엄마들과 떨어져서 대열의 맨 뒤쪽에 서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도 필사적으로 줄을 뒤로 당겼다. 내 앞의 아주머니가 줄을 겨드랑이에 끼고 눕다시피 해 아주머니의 머리가 내 배에 닿으려 하는 것도 잠시, 서로 엇박자로 줄을 당기는 바람에 아주머니 머리가 계속해서 내 턱에 부딪혔다. 줄을 당기는 동안 손이 밀리면서 장갑은 땅에 떨어졌고 맨손에는 까슬까슬한 밧줄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렇다고 아프고 말고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상대편의 강력한 힘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으니까. 결국 우리 팀은 1패를 기록했다. 잠깐 대열을 정비하는 동안 앞뒤의 학부모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와 박자를 못 맞추노?”
“거기는 왜 엇박으로 땡기는교?”
“줄을 옆으로 땡기면 안 되고 뒤쪽으로 땡기야 된다카이.”
“앞에 선생님이 구령하는 거 못 들었능교? 그거 듣고 따라 하면 되는데 선생님 목소리는 안 듣고 용쓰면 이겨지나? 앞에서 하는 거 좀 들으라카이!”
아, 선생님이 단합을 위해 구령을 외쳐주고 있었구나. 응원하는 소리와 기합 소리 때문에 선생님이 박자를 맞춰주는 줄도 몰랐다. 저마다 한마디씩 의견을 이야기하는 동안 조금 전 대열을 정비하던 남자 선생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님, 아버님, 제가 영차! 영차! 하는 소리를 잘 듣고 맞춰서 당기셔야 합니더. 아시겠지예?”
준비, 탕! 2차전이다. 앞쪽에서 선생님의 구령이 들렸다. 한 번 해봤다고 요령이 생겨서 구령에 맞춰 시작과 동시에 드러누워서 줄을 당겼다. 앞에서는 이번에도 누웠는데 아주머니의 옆구리가 내 손을 눌렀고, 뒤에서 줄을 잡은 분의 손목시계가 내 옆구리 뼈를 공격했다. 이번에는 팽팽히 맞서나 싶었는데 갑자기 몸이 오른쪽으로 쏠리면서 손에서 줄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학부모님 줄다리기는 백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참가해주신 아버님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들어가실 때 뒤쪽에서 고무장갑 하나씩 받아가세요.”
몇 게임이 더 이어지고 운동회가 끝났다. 고무장갑을 들고 집에 돌아가면서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열심히는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맨 뒤에 아저씨가 넘어져서 그래요.”
그제야 줄다리기 중에 갑자기 줄이 한쪽으로 쏠린 이유를 알았다. 줄다리기는 한 명 한 명의 힘이 세다고 이기는 경기는 분명 아니었다. 팀원 간의 협동이 바탕돼야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줄 잡는 법과 체중 싣는 법이 따로 있었다. 맨 앞쪽에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들을 배치해 줄을 끌어주도록 하고 맨 뒤쪽에서도 줄을 탄탄하게 당겨줄 사람들을 배치하되 전체 참가자들의 간격이 너무 넓어도 좁아도 안 되는, 그야말로 팀워크가 갖춰져 있어야 이기는 경기가 줄다리기였다.
다음 날, 도대체 전날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손가락마다 물집이 생겼고 특히 오른쪽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예상되는 큰 물집이 잡혔다. 어깨와 다리, 무릎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남편은 초등학생 운동회, 그것도 길어야 1~2분 경기인 줄다리기에 목숨이라도 바친 거냐며 놀려댔다.
전날 경기에 대한 아쉬움이 고스란히 통증으로 남은 아침, 손바닥의 물집을 물끄러미 보면서 다짐했다. 내 안에서 천국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줄다리기할 때면 하늘 어머니의 호령에 맞춰 천국 쪽으로 힘차게 줄을 당기겠다고. 그리고 나만 잘하려 하지 말고 형제자매와 함께 하늘 가족의 팀워크를 발휘해 서로 이끌어주고 당겨주며 천국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고.